하성란 소설가
한 출판사가 주관한 독자 여행에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초면이라 다들 어색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젊은 친구들은 그들끼리, 나이 지긋한 분들은 또 그분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움직였다. 기형도의 시 ‘빈집’ 이야기가 나온 건 밤꽃이 하얗게 뒤덮인 산중턱에서였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알고 있기 십상인데 사실 제목은 빈집이죠”라고 누군가 운을 뗐다. 과연 책을 많이 읽는 독자들답다, 감탄하고 있는데 몇 걸음 앞서 걷던 어른 한 분이 산 아래를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잘 있거라 요 짧았던 밤들아!” 젊은 친구들이 까르르 웃었다. 기형도를 중심으로 일행은 금방 하나가 되었다. 다음 구절을 곰곰 떠올리고 있는데 누군가 시를 읊었다. “공포를 기다리던 촛불들아? 아니, 아닌데.” 또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천천히 산을 오르면서 각자 떠오르는 시구들로 한 행 두 행 꿰어맞췄다. 금방 시 한 편이 되살아났고 우리는 소리를 맞춰 ‘빈집’을 외웠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마지막 행에선 합창하듯 소리가 커졌다. 와, 탄성이 터져나왔는데 그것도 잠시,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주야장천 그 시를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실연한 가을이었다. 소심해서 고백도 못했다. 그 사이 그는 다른 이와 사귀는 듯했다. 고백도 못했으니 실연이라는 말이 무색한데 두 달여를 혼자 끙끙 앓았다. 학교가 있는 명동은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었다. 콩 자루가 터진 듯 우르르 쏟아져나온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걸었다. 잠깐 멈춰서 있으면 영락없이 누군가의 발에 발이 밟혔다.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다 집으로 가려 명동역 개찰구를 통과할 때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함께 이 시가 떠올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과제로 제출할 시나 소설이 아니더라도 그 상심의 시간 동안 쓰는 일이 아니면 할 일이 없었다. 사랑을 잃었고 나는 쓰고 있었다.
훗날 이 이야기를 듣고 한 후배가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저도 사랑을 잃고 썼다면 썼습니다.” 헤어진 ‘여친’에게 그동안 들인 데이트와 갖은 선물에 대한 비용을 말하는 거였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실연의 상처를 잘 이겨내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의 여유를 되찾은 그가 예뻐 보였다.
요즘 기형도의 시 ‘빈집’이 떠오르는 건 일련의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왜곡된 사랑이 불러온 참담한 비극을 보면서 내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큰애를 떠올렸다. 그 애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사랑을 거절할 수도 있고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가끔 그 애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사랑의 기쁨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사랑을 잃은 뒤의 집은 빈집처럼 서늘하다. 사랑하는 동안 짧게만 느껴졌던 밤들과는 안녕이다. 고통스러운 긴 밤이 있을 뿐이다. 열망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실연했던 그 상심의 기간만큼 고요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깊이 침잠했고 내 속을 응시했다. 내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수만 가지 감정의 물결을 보았다. 나는 질투했고 질투하는 나를 창피스러워하기도 했다. 실연이 아니면 알지 못했을 감정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상심의 기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십여년 전 나를 위로한 것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구절이었다. 사랑을 잃은 이를 위한 처방전이 그 안에 있었다. 물론 쓴다는 것은 춤으로도 노래로도 다른 무엇으로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쓰고 또 쓰는 동안 나는 조금씩 편안해졌다. 그러니 사랑을 잃은 자, 쓰라.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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