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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 이계삼

등록 2012-10-25 19:08수정 2012-10-25 19:09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선거 때는 ‘미국에 사진 찍으러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몇 달 뒤에 ‘한신 장군도 어릴 때 무뢰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다’며 곧장 미국에 굴복한 어느 대통령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냐’며 자신을 포함한 정치지도자들의 공적 언어를 몸소 개골창에 처박은 지금 대통령의 임기도 몇 달 남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세 사람의 유력 대통령 후보가 매일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방송 카메라 앞에서 쏟아내는 말들의 성찬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을 문자 그대로 믿는 이는 별로 없다. 그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후보자들은 얼굴에 검댕을 묻히며 연탄을 나르고, 수십대의 카메라 앞에서 장애어린이를 발가벗겨 목욕시키고, 재래시장에 출몰하여 목도리를 걸쳐주면서 그 ‘말’을 ‘그림’ 속에 배치한다. 그러나 결국 핵심은 ‘말’이고, 그 말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며, 현실 속의 누군가를 찌르거나 보듬는 구체성이다.

투병중인 삼성 백혈병 노동자를 찾은 안철수는 자신의 핵심 공약인 경제민주화와 복지, 노동이 첨예하게 얽힌 그 자리에서 왜 ‘삼성’과 ‘이건희’라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했을까. 쌍용차 노동자 가족들을 찾아간 문재인은 왜 자신이 청와대의 핵심 참모로 재임하던 시절 시작된 쌍용차 비극의 원죄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을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백혈병 노동자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햇살 환한 병원 앞마당으로 걸어나오는 자애로운 미소가 아니다. 자살충동과 심신상실 상태에 놓인 해고자 가족들의 사연을 들으며 카메라 플래시 속에 눈물을 훔치는 인간적인 이미지도 아니다. 구체적인 말, 사실을 적시하고 의견을 피력하는, 구체적인 그 ‘말’이다. 삼성 노동자들의 백혈병과 노동자의 단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재벌 삼성의 책임을 연관지으며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극심한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겠다는 안철수의 약속, 쌍용차 노동자들의 자살 행렬에 연루된 참여정부의 책임을 깨끗이 인정하고, ‘정리해고’라는 자본의 집단적 살인 행각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문재인의 약속, 이런 것이다.

유성기업이라고 혹시 들어보았는가. 청와대, 국정원, 경찰, 경총, 노동부와 ‘유관협력체제’를 구축한 ‘창조컨설팅’이라는 노조파괴 전문 집단이 비열한 수법으로 끝내 노조를 와해시킨 것이 만천하에 공개됐지만, 이들과 공모한 사업주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아 노조 지회장이 고공농성을 시작한 사업장이다.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받고도 8년을 기다려 다시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해고자 신분으로 아르바이트와 친구들의 성금으로 버티던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최병승씨가 지금 15만4000볼트 고압 송전탑 허리춤에 자신의 몸을 묶고 열흘째 아슬아슬한 시위를 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는 김종인, 윤여준, 장하성 같은 책사들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 경제민주화에 대통령의 좌파적 세계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를 유린한 국가기관과 공무원을 법에 따라 처벌하고, 사법부의 결정마저 무시하는 기업주를 징벌하겠다는 ‘준법정신’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최병승씨의 송전탑 농성 소식을 들으며 나는 시인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이제는 장총을 들고 산야를 누비며 싸울 수도 없는 시대에,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지상의 자리를 떠나, 고압전류가 칼바람에 실려 넘실대는 고공으로 올라간다. “기다림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간절하다. 그 아슬아슬한 허공에 지금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매달려 있다. 이 현실의 폐부를 찌르는 지도자의 약속을 기다린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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