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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미안해요 카이스트 / 전진식

등록 2013-03-12 19:26

전진식 사회2부 기자
전진식 사회2부 기자
잊지 않으려고 글을 쓴다.

겨울이 녹으면 봄은 피어난다. 학교는 삭풍 부는 2월에 개강했었다. 올해부터는 3월에 학기를 시작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예년 봄학기보다 활기를 띠는 것 같아요.” 자주 만나던 학생의 말에서 봄의 체온이 느껴진다. 교정 벚꽃이 손수건처럼 내걸리는 봄이 곧 올 모양이다.

대전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미르관을 오랜만에 찾았다.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학교에 들렀지만, 걸음을 떼지 못하던 곳이다. 지지난해 겨울과 봄의 무참했던 일들이 잊힐 즈음, 지난해 4월 한 학생이 뛰어내린 기숙사 앞마당을 둘러보았다. 그때 이름 모를 교수가 스란치마처럼 다소곳이 두고 간 꽃다발과 편지가 등을 떠밀었다. 잔디밭 그 자리에는 버려진 오렌지맛 음료수 캔이 뒹굴고 있었다. “김군에게, 자네를 지키지 못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깝네… 부디 우리 카이스트를 사랑해주게…” 내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 속 봄빛은 여전히 처연하다.

그사이 학교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부지깽이로 아궁이 들쑤시듯, 학생들 마음을 학점 숫자와 돈 액수로 내몰았던 학사제도는 일정 부분 개선됐다. 떠난 학생들을 남은 학생들이 추모하던 학생회관 근처에는, 학생들이 설계·운영·관리를 도맡은 ‘신개념 학생회관’이 연말에 들어선다. 서남표 총장은 미국으로 떠났고, 그 나라에서 새 총장이 왔다.

하지만 서 전 총장이 6년 8개월 동안 머물다 떠나던 날 사과는 없었다. 2월22일 그가 남긴 이임사의 602개 어절 가운데 꽃다운 젊음을 슬퍼하는 부분은 없었다. 그날, 37차례 카이스트를 외치고 세계·대학·한국을 10여차례 말했지만 그게 다였다. 홍보실에서 정성껏 만든 ‘총장 일대기’ 영상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고통과 반성, 책임과 후회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도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내 컴퓨터 취재 파일에는 ‘카이스트 사태’를 기록한 메모 617개가 있다. 기사로 쓴 것도 있고 쓰지 못한 것도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하나하나 톺아보니, 세상에 내보내지 못한 메모가 더 많았다. 사안의 엄중함을 바로 보지 못하고, 일간지 기자의 못된 습성 ‘세상사 하루치씩 끊어 보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죽음의 원인을 끝까지 파고들기는커녕 경찰과 학교, 주변인의 말을 받아쓰는 데 허우적거린 것은 아닌가. 보관된 전자우편의 한 구절은 더욱 아프게 나를 찌른다. “한번 이슈화되고 사라지는 관심이 아닌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하는 문제로 인식되길 바랍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주말에 이런 얘기를 하셨다. 눈물이 그치질 않아 병원에 갔더니, 양쪽 눈물샘이 막혀서 그렇다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어머니는 내키지 않는다셨다. 하룻밤 자고 돌아온 자취방에서, ‘따뜻한 비관주의’라는 평을 받았던 시인의 시집들을 꺼내들었다. 억장 무너지는 마음보다, 몇장 기사 쓰는 게 전부인 듯 마음의 눈물샘을 닫아걸었던 기자가 아니었나 하는 마음에 이런 구절만이 돋을새김 보였다. “제 똥을 주무르는 치매환자의 미소처럼…” “담배불로 지져도, 얼음판에 비벼도 안 꺼지는 욕정/ 보석과 향료로 항문을 채우고서…”

진실한 사과에는 정직한 미안함과 책임의 통감, 사과받아야 하는 이에게 전하는 개선의 약속이 담겨야 한다. 온전히 이를 다하지 못하더라도, 갚을 수 없는 빚처럼 이태 넘도록 마음에 얹혀 있던 말을 해야겠다. 기자의 숙명일지라도, 스러진 그들의 개인정보를 캐묻고, 그들의 죽음을 묘사하고, 그들의 친구에게 원인을 진술해달라 독촉하다, 제풀에 나자빠진 일에 대한 최소한의 사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카이스트.

전진식 사회2부 기자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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