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개인의 양심과 교회의 권위 사이의 대립도 있다. 마르틴 루터는 “여기에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며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했다. 그것이 이단이 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간과하기 쉬운 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신앙심에 엄격한 제한을 가하면서 “교회가 말하기를”, 혹은 “성서에 따르면”이라는 문구를 앵무새처럼 반복해도 이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단의 역사를 간략하게 훑은 이유는 단지 그 계보와 유형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단의 역사가 주는 시사점이다. ‘이단’이란 서구에서 사악함이나 거짓과 연관된 부정적 명칭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에 관한 사실의 진술이었다. 실로 수많은 이단 논쟁을 통해 기독교 교리가 정비되고 체계화되었다. 이단의 역사를 통해 서구의 기독교계는 교파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다른 교파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배웠다. 왜냐하면 이단의 정의를 내리는 신학자라 할지라도 유한자로서 무한하고 불가해한 신 앞에선 겸허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에 비추어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 교계에 만연하는 이단은 이단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비합리적 행태의 연속이다. 금전, 폭력, 성과 관련된 끊임없는 추문에도 사이비 종교가 횡행한다. 최소한의 인문학적 소양만 갖춰도 그 단순한 부조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양 없는 군중을 탓할 것만도 아니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단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앞장서지 못한 기성 교단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
이단의 문제가 수없이 제기되고 해결되었던 서구에서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핵위협이나 환경 문제 등으로 파악하면서 의연하게 미래에 대비하는 반면, 우리 교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종말론으로 위협해 혹세무민한다. 그 부끄러운 대비야말로 우리가 이단의 문제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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