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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수의 고전중독] 사람 잡는 단장취의

등록 2013-07-01 19:19수정 2013-07-15 13:59

중국 춘추시대인 서기전 559년, 강대국 진(秦)나라에 대항해 열국이 연합공격을 펼쳤다. 경수라는 강에 이르러 건널지 말지를 두고 연합군 내부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진(晉)나라 대부 숙향은 노나라 경대부 숙손표를 찾아가 그의 뜻을 물었다. 숙손표는 “박에는 쓴 잎도 있습니다”(匏有苦葉)라고 답했다. 숙향은 이를 강을 건너겠다는 말로 받아들여 배를 준비했다.(<춘추좌전> 양공 14년) ‘포유고엽’은 <시경>에 나오는 사랑 노래의 한 구절이다. “박에는 쓴 잎도 있고/ 강물 건널목엔 깊은 곳도 있네/ 물 깊으면 바지 입은 채 건너고/ 얕으면 가랑이 걷고 건너네.”(匏有苦葉/ 濟有深涉/ 深則厲/ 淺則揭) 강가에서 기다리는 여인이 자기 연인에게 깊든 얕든 꼭 물을 건너오라는 얘기를 하는 시이다. <시경>의 한 장을 잘라 의사를 표현하는 춘추시대의 이런 외교 어법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한다.

단장취의는 교양의 압축적 표현이지만, 문학의 은유를 은밀한 선동으로 해석할 때는 위험이 따른다. 시 한 구절과 목숨을 바꾼 사례들이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꼬리를 문 건 그 때문이다. 가령 명나라 시인 고계는 <궁녀도>란 시를 썼다가 이를 자신에 대한 풍자로 받아들인 태조 주원장에 의해 도끼로 허리 잘려 죽었다. 청나라 문인 서준(徐駿)은 “청풍은 글도 모르면서/ 어찌 책갈피를 어지러이 들추는가”(淸風不識字/ 何事亂飜書)라는 시구 때문에 옹정제에게 목이 잘렸다. 조선의 남이 장군도 “사내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이란 시구 때문에 처형당했다.

오해하기로 작정한 어리석은 자들 앞에서는 시문학은커녕 일상대화나 평서문조차 안전하지 않다. 쫓기던 조조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 여백사의 집에 묵었다가, 밖에서 “먼저 묶어놓고 죽일까?”라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대접할 돼지를 잡느라 한 말인데, 자기를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한 조조는 여백사 일가를 모두 죽였다. 이건 사람 잡는 단장취의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방북 때 남북 정상 대화록에 대한 국정원과 집권 여당의 단장취의가 극심하다. 문학작품도 아닌 평서문을 정상적으로 독해할 능력이 없는 이들은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킨 조조만큼 위험한 존재들이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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