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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선시대 사관들의 직업윤리

등록 2013-07-22 19:12수정 2013-07-22 22:43

[이상수의 고전중독]
동아시아에서 공정한 역사 기록은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당대 역사 기록인 사초(史草)는 군주도 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사초를 본 사람은 당태종이다. 재상 방현령은 당태종의 협박에 굴복해 급히 사초를 뜯어고쳐 <실록>이라고 가제본해 바쳤다. 당태종은 방자한 권력 행사 덕분에 군주의 사초 열람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는지 실증해 보인 공을 세웠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당태종도 사초를 보지 않았느냐”며 사초를 보겠다고 우겼으나 사관들은 굽히지 않았다. 사관 신개는 △당태종의 고집 때문에 방현령도 사초를 고쳐 썼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겠다면 다른 책들도 많으며 △사관 수십명이 크로스체크하며 기록하므로, 제대로 쓰는지 보겠다는 것도 이유가 못 되고 △사초를 열람한다면, 당신에게 좋은 기록이 남더라도 후대인들이 공정성을 의심할 것(<태조실록> 7년)이라고 논박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실록>을 빨리 편찬하라고 재촉했지만, 사관들은 객관성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3대 뒤에 편찬해야 한다고 맞섰다. 태종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관들만 골라 실록을 완성했지만, 그 기록을 못 보고 죽었다. 아버지 대의 기록을 아들 왕이 본다면 객관성이 훼손된다는 이유로 사관들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도 <태조실록>은 봤지만, 아버지 대의 기록인 <태종실록>은 황희·신개 등의 반대로 보지 못했다.

연산군도 사초를 직접 보지는 못했고, 국가정보원의 엔엘엘 발췌본 비슷한 필사본을 보았을 뿐이다. 사관들은 사초를 가져오라는 연산의 명령에 맞서 “사관은 군주가 사초를 못 보도록 하는 게 고유 직무”라고 버텼다. 연산군의 부당한 횡포를 기록에 남기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저항수단이었다.

오늘날 국가기밀과 기록보관 담당자들은 조선시대 사관들의 직업윤리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듯하다. 국정원장은 기밀자료를 멋대로 유출하고, 국가기록원은 자료를 찾아내지도 못하고 불법열람 의혹까지 받고 있다. 기록문화의 공정성이 정치에 오염된 이들의 모럴 해저드에 의해 이 정도로 짓밟히면, “나의 직무는 기밀자료의 불법유출과 불법열람을 막는 것”이라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양심 선언하는 이가 나와야 마땅하다.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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