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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청와대에 도청기를 달면 어떨까

등록 2005-08-25 18:04수정 2005-08-25 18:06

박찬수 위싱턴 특파원
박찬수 위싱턴 특파원
아침햇발
1940년 어느 여름날,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에 한 기술자가 찾아왔다. 리플리 키엘이란 유명한 발명가였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책상 서랍과 밑바닥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자신이 발명한 기기를 하나 설치했다. 당시로는 최첨단의 녹음기였다. 집무실에 녹음기가 설치된 사실은 대통령과 극소수만이 아는 특급비밀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 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임할 때까지 녹음기는 계속 돌아갔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성능은 훨씬 개선됐다. 대통령들은 물론 녹음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벌오피스에 들어선 외부인사나 각료들에겐 사실상 ‘도청’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런 시설이 있다는 게 알려진 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와중에서였다. 테이프 존재사실이 알려지고 이것이 의회 청문회에 제출되면서 닉슨은 결정적으로 몰락했다. 여기엔 워터게이트 사건을 숨기려 한 닉슨의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테이프가 공개됐을 때 어느 신문의 헤드라인은 ‘닉슨이 자신을 도청하다’였다.

닉슨 이후 후임 대통령들의 집무실 녹음은 크게 줄거나 아예 폐기됐다. 닉슨의 자리를 승계한 제럴드 포드는 “우리 대화는 역사적 기록을 위해 녹음됩니다. 동의하죠?”라고 각료에게 물어보고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가장 최근 퇴임한 빌 클린턴도 녹음기를 설치했으리란 추측이 있지만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녹음 테이프가 있다 하더라도 그 분량이 매우 적을 것이라는 데엔 이견이 별로 없다. 녹음이 자칫 자신의 목을 찌르는 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닉슨 이전의 대통령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집무실 대화를 녹음했을까? 잘 아는 메릴랜드대학 퇴직 교수에게 물어보니 “자신의 위업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학자 윌리엄 도일은 “전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미국 대통령들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증거를 갖기 위해 녹음을 했다”고 분석했다. 어느 쪽이든 역사를 의식한 행동이란 건 분명하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필기메모에 비해, 녹음 테이프는 객관성을 확보해줄 수 있다.

요즘 국내에선 이른바 ‘안기부 엑스파일’을 둘러싼 전·현직 대통령들의 언행이 관심거리다. 전직 대통령들은 “그런 건 알지도 못했고 보고받은 적도 없다”고 펄쩍 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엑스파일을 둘러싼 음모론에 “나는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답답해했다. “1997년 대선후보를 조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그의 말을 두고, 이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호하려는 건지,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염두에 둔 말인지 추측이 갈린다. 어느새 대통령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이 된 것 같다. 오랫동안 청와대와 국민 사이에 쌓인 불신의 벽이 높은 탓이다.

우리도 청와대 집무실에 녹음기를 한번 설치해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재임중 녹음한 내용은 그 대통령이 숨진 뒤에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러면 적어도 몇십년 지난 뒤에는 그때 그 대통령이 한 얘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자기가 숨진 뒤에라도 진실이 공개되니, 대통령은 지금부터라도 훨씬 솔직하게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실체적 진실인 엑스파일 내용보다, 전·현직 대통령을 둘러싼 진실게임이 더 요란스러워지는 요즘 상황을 보면서 드는 부질없는 생각이다.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그깟 녹음기로 얻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게 우습고도 슬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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