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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도현의 발견] 기별

등록 2013-09-08 19:11

그렇게 요란하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잠잠해지자 벚나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찬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잎사귀들을 땅에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잎사귀를 빨리 땅에 떨어뜨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잎사귀 끝까지 연결돼 있던 수분 공급선을 끊는 일이 시급했다. 물과 영양을 싣고 가던 잎맥 속 모든 트럭의 운행을 중지시켰다. 그렇게 한 가지 조처를 내리는 데도 벚나무는 온몸이 저리고 아팠다.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나뭇잎을 설득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영원한 것은 없는 거야. 나뭇잎들은 앙앙대며 차갑게 울었다. 내년 봄에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우려면 가장 빨리 헤어질 줄 알아야 해. 며칠 동안 벚나무는 끙끙 앓았고, 엄청난 에너지를 투여한 끝에 가까스로 한 장의 낙엽을 땅으로 내려보냈다.

낙엽은 벚나무 아래 귀뚜라미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자 기타를 치고 놀던 귀뚜라미가 깜짝 놀라 튀어올랐다. 귀뚜라미는 봉숭아 씨앗이 들어 있는 꼬투리로 내려앉았다. 그때 꼬투리 속에서 씨앗이 하나 톡 뛰쳐나왔다. 봉숭아 씨앗의 가출을 놓치지 않은 건 딱새였다. 딱새는 재빨리 부리로 씨앗을 물고 날아오르다가 그만 풀밭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씨앗 하나 때문에 풀밭의 쑥부쟁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쑥부쟁이들은 작지만 환한 연보랏빛 불을 이마에 달고 씨앗을 찾아 나섰다. 산비탈의 산국도 구절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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