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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수의 고전중독] 말들의 침묵

등록 2013-09-09 18:30

위나라의 종육과 종회 형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해 이름을 날렸다. 황제 조비가 아버지 종요에게 두 아이를 한번 보고싶다고 했다. 황제 앞에 서자 형 종육은 땀을 줄줄 흘렸고, 동생 종회는 땀이 전혀 나지 않았다. 황제가 종육에게 물었다. “어찌 그리 땀을 흘리는가.” “두렵고 황공하여 땀이 국물처럼 흐릅니다.” 황제가 종회에게도 물었다. “어찌 땀을 흘리지 않는가.” “두렵고 떨려서 땀이 감히 나오지 않사옵니다.”

 형제의 엇갈린 대답에 관한 일화는 또 있다. 아버지가 낮잠 잘 때 형제가 작당해서 약주를 훔쳐 마셨다. 아버지는 자는 척하며 이들을 훔쳐보았다. 종육은 절하고 마셨지만 종회는 그냥 마셨다. 아버지가 종육에게 물었다. “왜 절을 했느냐?” “음주 예법에 따라 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종회에게도 물었다. “왜 절하지 않았느냐?” “도둑질은 이미 예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는 엇갈린 대답을 통해 황제 앞에서 진땀 나는 이와 나지 않는 이, 예법을 묵수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모두를 변호했다. 한 가지 목소리만 있는 것보다 다양한 답이 있는 세상이 더 살 만한 곳이다.

 청나라 시인 공자진은 이런 시를 남겼다. “세상에 생기가 넘치는 것은 비바람과 번개가 자극을 주기 때문인데/ 만 마리 말이 똑같이 벙어리가 되었으니 참으로 슬프다/ 내가 권하노니, 하느님이여 거듭 정신 차리소서/ 인재를 내리시려거든 한 가지 규격에만 맞추지 마소서.”(九州生氣恃風雷/ 萬馬齊瘖究可哀/ 我勸天公重抖擻/ 不拘一格降人才 <己亥雜詩>) 하느님에게 정신 차리라고 얘기했으나, 사실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이다. 모든 말이 침묵하는 만마제음(萬馬齊瘖)의 세상은 지옥의 문턱일 따름이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무리한 구속에 이어 ‘사찰’ 냄새 물씬 풍기는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신상 털기 보도 뒤에는, 국가정보원 개혁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낡은 공작정치의 검은 광기가 너울거린다. 만마제음의 미친 세상에 맞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생명 가진 모든 이들의 의무이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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