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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지옥의 가족 / 이유진

등록 2013-09-22 18:39수정 2013-09-30 18:05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즐겨 보는 주말드라마엔 ‘시월드’, ‘처월드’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재벌집 시어머니는 일하는 며느리 발치에 값비싼 도자기를 집어던지고 노트북을 박살내며, 부잣집 예비 장모는 돈을 무시한다고 예비 사돈과 사위를 을러댄다. 가난한 가족들은 돈타령에 날이 샌다. 더없이 참담한 지옥굴, 가정이란 이름의 ‘돈월드’다.

명절 전후 주부들이 인터넷에 올린 넋두리를 보면, 실제 삶도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안 그래도 빠듯한 살림에 계속 돈을 요구하는 시부모, 쥐꼬리만한 돈 빌려주고 모멸감도 함께 주는 시동생, 상속이 적다며 발길 끊은 형제, 못사는 자식을 차별하는 친정 부모 등 돈 문제가 많다.

명절 직후엔 가족 갈등이 극대화한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최근 5년 동안 명절 직후 이혼건수는 전달보다 평균 11%가 많았다고 한다. 2008년 경제위기를 맞은 추석 직후엔 전달에 견줘 이혼이 43%나 급증했다. 명절 때 가부장적 가족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이른다는 얘기지만,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특히 친지 때문에 서민들이 겪는 경제적 갈등은 생각보다 크다. 가족끼리 당연히 도와야 한다는 도덕률과, 자칫 모두 함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적인 문제는 ‘복지의 구멍’과 깊이 연관된다. 헌법상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고, 국가는 사회복지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가진다. 민법을 보면, 가족들도 서로 부양의 의무가 있다. 이에 사회복지 관료체제는 국가보다 가족이 먼저 부양 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온 가족이 폭탄 돌려막기를 하는 동안, 국가는 뒷짐을 지고 있다가 더 급박한 상황이 되면 친족보다 훨씬 큰 모욕을 주면서 쥐꼬리만한 은전을 베푼다.

미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복지 수혜자들이 존중은커녕, 벌거벗겨지는 듯한 적대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부양의무자 기준이 그렇다. 수십년 전 헤어진 부모·자식을 추적해 고통스러운 서사를 말하는 조건으로 자격을 심사한다. 한정된 재원 탓이란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 목표 대비 세수 징수실적은 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상속·증여세 세수 부진이 크다고 한다. 점점 우리 사회가 가난한 가족 복지에는 인색하고 부자 가족들한텐 관대한 곳이 돼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판국에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은 기초연금 대선 공약도 지켜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렇게 되면 노인 빈곤 개선 수준은 미미할 것이라고 한다. 국가가 약속했던 경제적 지원만큼 가족이 감당해야 할 몫도 커질 것이다. 효사상 같은 전통적 가족관념이 떠오르는 가운데 증여와 부양을 둘러싼 갈등도 증폭될 조짐이 보인다. 상호 존중하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가족관계는 돈 앞에 길을 잃는다.

계급 재생산을 위해 온 가족이 ‘자식 투자’에 열을 올리는 요즘은 먹고살 만한 중산층 사이에서도 비슷한 형편의 며느리와 사윗감을 선호하며 심지어 새로운 ‘진입 가족’에게 보상을 바라는 것도 당연하다는 얘기들까지 터져나온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친지가 생기면 자기 일상에서 위협받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국가 원조를 가족한테 전환하는 보수주의적 복지체제의 속성이 은근슬쩍 강해지고 있다. 국가가 가족에게 부양의 책임을 미루는 동안, 더욱 많은 가족들이 서로에 대한 경제적 거래의 기대감을 갖고 미래행 열차에 함께 탑승한다. 하지만 종착역은 생각보다 훨씬 나쁜 곳일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손 놓을 때, 가정은 점점 더 지옥에 가까워진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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