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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수의 고전중독] 가을 매미만 남았을 때

등록 2013-09-23 18:49

한가위를 지나니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가을바람과 함께 울 힘을 상실한 매미를 ‘한선’(寒蟬)이라고 한다. 작은 체구에서 소음공해 수준인 80데시벨을 뿜어내던 매미가 어느덧 존재감을 상실한 것이다.

‘한선’이라는 말은 동한 때의 두밀이 남겼다. 그는 성품이 질박하고 강직하여, 좋은 인재는 힘써 천거하고, 악행을 저지른 자는 비록 그가 권세 있는 환관이더라도 강력하게 성토했다. 그가 발굴해낸 이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한나라 최고의 고전학자인 정현이다. 환관과 싸우다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현의 됨됨이를 알아본 두밀은 그를 힘써 관리로 추천했고, 그가 관료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자 태학에 추천해 학문을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역> <상서> <춘추좌전> 등 적지 않은 고전을 순탄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정현과 그를 후원한 두밀의 공이 크다.

두밀은 은퇴하여 낙향한 뒤에도 좋은 인재 발굴과 악한 성토를 그치지 않았다. 동향 사람으로 태수 벼슬을 지낸 유승이란 이도 비슷한 시기에 은퇴하고 낙향했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영천 태수 왕욱이 두밀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유승이 깨끗하고 높은 선비라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밀은 이렇게 말했다. “유승은 대부의 높은 자리까지 올라 나라로부터 최고 대우를 받은 사람이면서도, 선한 사람을 보아도 천거하지 않고, 악행을 보고도 성토하지 않는다. 진실을 덮고 자기 한 몸만 아껴 가을 매미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이런 자는 죄인이다.”(知善不薦, 聞惡無言, 隱情惜己, 自同寒蟬, 此罪人也.) 두밀의 발언은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울린다. 해야 할 말을 못하고 가을 매미처럼 입 다물고 있는 것을 형용한 ‘금약한선’(噤若寒蟬)이란 말은 두밀로부터 왔다.

<자본론> 강의한 교수를 학생이 고발하고, 북한 말투 흉내 낸 이를 신고하는 정신 나간 세상에서 언론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공안과 공작이 판을 쳐서 언론이 위축되는 현상을 ‘위협효과’(chilling effect)라고 한다. 현대 중국어로는 이를 ‘한찬샤오잉’(寒蟬效應, 한선효응)이라 한다. 가을 매미만 남은 세상, 그 사회의 미래는 없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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