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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돈 안 드는 공약이라도 실천하길 / 장덕진

등록 2013-09-29 19:12수정 2013-09-30 17:57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연금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된 데 따른 파장이 적지 않다. 나라살림이 특별히 어렵단다. 그럼 나라살림이 어려워서 지키지 못하게 될 공약은 이게 마지막일까. 공약을 할 당시에는 나라살림 어려울 줄 예상 못했을까. 현 정부의 주요 정책목표 중 하나가 70% 고용률을 달성하는 것이니, 당시 박근혜 후보의 일자리 관련 공약을 찾아보자. 공공부문 청년층 일자리 확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추진, 비정규직 근로자 사회보험 비용의 국가 부담 등이 눈에 띈다. 필요 예산은 9000억원이라고 공약집에 적혀 있다.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연봉 3000만원 정도를 곱해보면 이것만으로도 6000억원이 소요된다. 나머지 3000억원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사회보험 비용 부담 등을 해결하는 마법을 부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예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우니, 앞으로도 지키지 못하는 공약은 줄을 이을 것이다.

그럼 공약을 안 지키는 대통령은 박 대통령이 처음일까?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공약들 중 제대로 지켜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747은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그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 국민 세금을 투입하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럼 보수 정치 세력만의 문제일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4조5000억원을 들여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22조5000억원이 소요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귀결되었다. 문재인 후보가 이겼으면 달라졌을까? 꼭 그렇지도 않았을 것 같다. 대선 당시 두 후보의 공약집을 분석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박근혜 후보는 공약에 필요한 소요재원을 비현실적으로 적게 잡고,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재원 조달 대책은 세출 구조조정, 지하경제 양성화 등 애매모호하게 해놓았다는 것이었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정책 간의 정합성이 더 치밀하고 재원 조달 계획도 더 구체적이지만 소요재원 자체가 워낙 많아서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럼 이전 대통령들도 공약 못 지키긴 마찬가지였으니 박 대통령은 이제 공약 부담에서 벗어나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첫째, 새누리당부터 앞장서서 상시적인 정책정당으로 바꿔나가고, 지키지 못할 것임을 뻔히 알고도 일단 공약부터 남발하는 ‘먹튀 선거’를 원천 차단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된 다음에야 급조된 공약집이 등장하고, 그나마 투표일 며칠 전까지 곳곳에 빈칸이 뻥뻥 뚫린 채 남아 있는 것은 정치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통의 문제이긴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캠프는 이러한 후진성을 특히 악용했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야당의 선거 의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유권자들이 정책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공약 내지는 이미지를 남발하고 뒷감당은 애매모호하게 해놓은 것이다. 이런 식의 선거 전략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둘째, 나라살림과 상관없는 돈 안 드는 공약들만이라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공약집을 살펴보면 돈 한 푼 안 들지만 지켜지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국격을 높일 수 있을 공약들도 수두룩하다. 책임장관제, 대탕평 인사, 국회의원 후보 선거 2개월 전 확정, 대선 후보 4개월 전 확정, 대통령의 정기적 노사대표 회동, 긴급조치 피해자 명예회복 등 돈 한 푼 안 들이고 지킬 수 있는 공약은 수없이 많다. 돈 안 드는 공약이라도 지켜서 신뢰를 얻어야 나라살림 때문에 공약 지키기 어렵다는 호소도 신뢰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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