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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엄마의 웹툰 입문기 / 김영희

등록 2013-11-20 18:52수정 2013-11-20 21:19

김영희 문화부장
김영희 문화부장
지각이 아슬아슬한데도 각각 화장실에 들어간 예비수험생 고2와 중2 아들들은 함흥차사다. 보나 마나 핸드폰이다. 낄낄대는 녀석들 손에는 언제나 웹툰. 애써 너그러운 체 “어떤 게 재밌는데?” 한마디 건넨다. 요일별로 작품을 줄줄 대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버럭, 솟구치는 분노를 자제하기 힘들다. 핸드폰을 뺏어 말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만화광이었다. 성적이 왕창 떨어진 어느 날, 수년간 모았던 만화책 수백권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분서갱유’를 당했다. 화장대에 쌓인 동전을 슬쩍해 만홧가게에 다니다 딱 걸렸던 날은, 생애 처음 진지하게 가출을 고민했다.

어릴 적 나의 모든 잡다한 지식과 취향은 특히 일본 순정만화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완>을 보며 발레 용어를 알았고, <맨발의 청춘>을 보며 테니스 규칙을 익혔고, <유리가면>을 보며 연극의 재미를 느꼈다. 프랑스혁명은 당연히 <베르사유의 장미>를 통해 알았고, 낭만적인 러시아혁명관을 갖게 된 건 <올훼스의 창> 탓이다. 과 동기들이 우스갯소리로 영화 <인디아나 존스> 때문에 고고학을 선택했다 할 때도 나는 만화 <나일강의 소녀>였다.

하지만 그 탐닉도 몇몇 소년만화와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 강경옥 작가 정도에서 멈춰버렸다.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 또는 일본 만화를 좋아한다는 게 뭔가 떳떳하지 않다는 ‘강요된’ 인식 때문이었을까. 눈치 볼 필요 없어진 어른이 되고 나선 여유가 없어졌다. 취향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챙겨 봐야 할 것이 많다는 핑계로, 무언가에 빠지거나 ‘중독’되는 걸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만화잡지 전성시대가 저물면서 한국 만화는 웹툰이라는 또다른 길을 찾게 됐다. 효시 격인 강풀의 <순정만화>가 2003년 10월부터 연재됐으니 10년이다. 올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의 한국관엔 웹툰홍보관이 처음 설치됐고, 몇몇 작가 사인회엔 외국인들이 번호표를 들고 줄을 섰다.

하루 1000만명이 찾는다는 웹툰의 산업적 성공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다. 1970~80년대 당시엔 정식계약 없는 일본 만화가 태반이었다. 가공의 한국인 이름으로 버젓이 책이 나오는가 하면, 아예 한국 작가들이 조악하게 모사하거나 표절한 작품도 상당했지만 어린 나로선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몇년 전 일본에서 구입한 <스완>을 보다가 영국인 브라운 선생이 원래는 소련인 세르게예프였고, 선이 거칠었던 한복은 기모노 위에 덧칠해놨던 것이란 깨알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정말 80년대스럽다’며 킥킥거렸다. 그렇게 일본 또는 미국·유럽 만화의 연출과 그림을 보고 베끼며 배우던 시절과 달리 웹툰의 시대엔 외국 작가들이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배운다. 문화가 국가대표 경쟁하듯이 순위를 매길 일은 아니지만, 이런 현상이 반가운 건 너무나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서 만화에 ‘삼류’문화 꼬리표가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 검색어 1위로 올라온 단어를 눌러버렸다. 화요 웹툰의 강자라는 <노블레스>, 잠깐만 맛볼까 하다 그길로 304회까지 정주행에 들어서고 말았다. 아직 익숙하진 않다. 종이만화책을 볼 땐 나만의 느낌을 즐겼던 것과 달리 시시각각 올라오는 댓글은 개인의 감상마저 좌우한다. 세로 구성과 스크롤 압박도 불편하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태블릿피시 앞에 머리를 맞대고 웹툰에 대해 떠드는 이 순간이 좋다. 문화콘텐츠에 ‘유독물질’ 같은 딱지가 붙으며 국가가 개인의 취향에까지 손 뻗으려는 때, 시절이 하 수상할수록 취향대로 살자 다짐하며. 내가 그랬듯 설사 좀 돌아가더라도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 믿으며.

김영희 문화부장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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