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방공식별구역(ADIZ)은 여러모로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닮은꼴이다. 며칠 전만 해도 방공식별구역이란 말을 들어본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지금은 ‘모르는 사람 손들어 봐’가 더 빠를 것이다. 북방한계선도 1990년대까지 일반인에게 생소한 용어였다. 그러나 1999년 6월 남북 교전 이후 하루아침에 ‘모르면 간첩’ 수준의 말이 됐다. ‘전염’ 속도가 가히 광속이다.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도 같다. 방공식별구역은 자국으로 향하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식별하고 필요한 조처를 취하기 위해 군사 목적으로 설정한 임의의 공역이다. 아무도 방공식별구역 진입을 막을 법적 권리가 없다. 세계적으로도 그런 구역을 둔 나라는 20개국이 채 안 된다고 한다. 북방한계선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뒤 미군이 남북 충돌 방지를 위해 일방적으로 설정한 선이다. “남쪽 해·공군 병력은 이 선을 넘지 말라”가 애초 취지다. 남쪽 인원과 물자를 스스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북한과 협의할 이유도, 통보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한번 입길에 오르자마자 요동을 쳤다. 방공식별구역은 순식간에 거의 배타적 주권이 미치는 영공 수준으로 격상했다. 누구는 준(準)영공이라고 한다. 정부는 “왜 수수방관하냐”는 여론의 성화에 방공식별구역 확대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북방한계선은 어떤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7월 이양호 국방장관은 국회에서 “북한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와도 괜찮다는 것이냐”는 항의성 질의에 “그렇지요. 이것은 정전협정하고 관계없이 우리 어선 보호를 위해서, 또 우리 해군 함정이 북측 가까이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해상에 그어놓은 선”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2013년 6월엔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키고 죽음으로 지킨 곳”(박근혜 대통령)으로 ‘신격화’됐다.
채식이 몸에 좋다고들 한다. 그러나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람은 원래 육식동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자기 영역에 민감한 건 육식동물이다. 다른 무리의 침범을 용납하지 않는다. 초식동물에겐 ‘누구 땅이냐’가 없다. 무리지어 초지를 따라 이동할 뿐이다.
욕망엔 죄가 없다. 그러나 욕망 실현의 양태가 한결같았던 건 아니다. 당연해 보이는 땅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은 16세기 인클로저 운동의 산물이다. 봉건 영주는 농민의 경작지를 일방적으로 회수하지 못했다. 땅에 대한 욕망이 소유권과 경작권으로 병존했던 셈이다. 영토가 확립되고 영토 경쟁이 격렬해진 것도 근대국가 출현 이후다. 봉건시대 유럽엔 영지는 있어도 영토는 없었다. 상속이나 지참금 등을 통해 취득한 군주의 영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이게 누구 영지냐”는 일반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근대 민족국가 성립 이후 ‘우리 땅’ 욕망은 구성원 모두의 가슴을 울리는 화두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뜨거웠던 방공식별구역 논란에선 일단 중국이 ‘한 건’ 한 것 같다. 미국은 우발 충돌 방지 메커니즘과 대화 채널을 제안해 중국의 발언권을 일부 받아들였다. 일본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낙동강 오리알’이 된 느낌이다. 한국이 방공식별구역 확대로 맞받았지만, 얼마나 큰 변수가 되겠는가.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영유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도발과 불안정성은 지속될 것이다. ‘우리 땅’에 대한 민족주의 욕망이 충돌하는 게 이것만도 아니다. 독도도 있고 쿠릴열도도 있다. 한·중·일의 바다 경계선 획정도 잠재적 갈등 요인이다.
땅 욕심이 본능이라면, 욕망을 해소하는 방식은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답이 없는 배타적 영유권에 집착할 일이 아니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존의 욕망 해결 방식을 찾아볼 때가 아닐까.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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