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 국제부장
“4대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네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에 둘러싸인 개미와 같다. 네 마리 코끼리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제각기 뛰어다닐 때, 개미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당황스러울 것이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폴 케네디 미국 예일대 교수가 오래전에 한국의 지정학적 곤경을 지적한 말이다. 요즘 한국의 처지를 예견한 말처럼 들린다.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유일 패권국 미국에 ‘신형 대국관계’를 요구하고 나선 중국의 눈부신 부상, 패권을 잃지 않으려는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이 맞부딪쳐 일으키는 협력과 갈등의 이중 파열음은 냉전 종식 이후 가장 중요한 세계사적 지각변동이라 할 만하다. 일본에선 의회를 장악한 아베 신조 총리가 보수세력의 숙원인 집단적 자위권 행사,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따위를 밀어붙이며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를 향해 폭주하고 있다. 한·중·일의 물고 물리는 역사인식·영토분쟁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한다.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높아지는데도 정치·안보 갈등이 지속되는 ‘동아시아 패러독스’가 뚜렷하다. 지난 20년간 동북아 최대 안보 현안이던 북한 핵문제는 졸지에 ‘듣보잡’ 신세가 됐다. 미·중의 외면과 ‘장성택 숙청’의 여파 따위가 맞물려 북한이 제4차 핵실험으로 치달을까 걱정이다.
코끼리들의 관계 재조정 힘겨루기는 신냉전을 방불케 한다. 코끼리들이 한국에 묻는다. ‘너는 누구 편이냐’고. 지금 한국의 처지가 ‘답 없는 문제’를 받아든 학생과 다를 게 없다.
‘네 마리 코끼리 사이에 낀 개미’는 한국의 숙명이 아니다. 생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폴 케네디의 ‘네 마리 코끼리론’을 비틀어 “도랑에 든 소가 양쪽의 풀을 뜯어 먹듯이 우리가 지혜롭게 하면 4대국이 모두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1998년 북한의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이 불거졌을 때, 김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 페리 프로세스를 이끌어냈고, 내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는 클린턴의 방북 추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방북에 밑돌이 됐다. 그때 한국은 명백히 동북아 평화·번영의 촉진자였다. 이런 흐름을 끊으려고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북한 농축우라늄 의혹’으로 ‘2차 북핵 위기’를 일으켰지만, 갓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은 주저앉지 않았다. 200만㎾ 대북 송전 제안 등으로 북한과 미국을 설득하고 중국과 협력해 ‘동북아 탈냉전 청사진’으로 불리는 9·19 공동성명 채택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내처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한국전쟁 종전 선언과 평화로운 서해를 이루려 했다.
한국은 남북 화해협력을 지렛대 삼아 동북아 평화·번영의 촉진자를 자임할 때 삶터와 외교 공간이 넓어졌다. 그러나 10년 공든 탑이 북한 붕괴론에 사로잡힌 이명박 정부와 종북몰이에 머리를 처박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가뭇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 결과가 독자적인 어젠다를 상실한 채 ‘다리 밑에 버려진 아이’ 처지에 내몰린 한국이다.
‘60년 유일 동맹’ 미국, ‘최대 교역국’ 중국, ‘애증의 이웃’ 일본, 그 누구도 한국의 전략적 이익과 역사적 정체성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누구 편이냐’는 질문엔 한국이 고를 답이 없다. 질문도 답도 스스로 벼려야 한다. 2000년대 초중반의 한국이 그러했듯이. 보수 기득권 세력에 의해 중세의 마녀처럼 화형당한 남북 화해협력과 동북아 평화·번영 촉진자의 꿈, 그 잿더미에 부활의 불씨가 있다.
이제훈 국제부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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