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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단성소 / 정영무

등록 2013-12-11 19:19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같은 해(1501년) 태어나 닮은꼴로 평생 학문에 몰입하고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후대의 실학자 이익은 경상좌도의 퇴계는 성리학의 뿌리인 인을 세상에 펼쳤고, 경상우도의 남명은 일상생활에서 의를 실천했다고 평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퇴계는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대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갔다. 남명은 부친이 관직에 올랐다가 미운털이 박히는 수모를 보고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껴 과거를 중도에 포기했다. 예순 넘어까지 벼슬에 나아감과 물러남을 반복한 퇴계는 사직서를 79번 썼다고 한다. 반면 남명은 여러 차례의 벼슬 제의에도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세 차례 서찰을 주고받았다. 퇴계가 남명에게 벼슬을 권하자 남명은 눈병까지 있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며 사양했다.

1556년 명종이 단성현감의 벼슬을 내리자 남명은 사양하면서 단성소를 올린다. 외척의 전횡, 파쟁으로 인한 정치문란 등 당시의 시폐를 낱낱이 지적해 올린 상소다.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이미 떠나버렸습니다. 큰 고목이 백 년 동안 벌레에 먹혀서 그 진이 다 말라버렸으니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명종실록에는 상소를 읽은 명종이 진노했다고 기록돼 있다.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가지 백가지의 천재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라는 대목에 이르면 임금이 대단히 노여워해 안색이 온화하지 않고 음성도 고르지 않았다는 사관의 주석이 실감난다. 하지만 명종은 “조식이 시골에 은거하는 선비이기 때문에 너그러이 용납하고 죄를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제군주 시대에도 경연과 상소, 언관 등으로 언론의 자유는 보장됐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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