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문화부장
지난달 밤늦게 혼자 우연히 한 방송 프로그램을 보다 끝내 중간에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머리가 깨질 듯 주체 못할 정도로 눈물을 흘리다 보니, 이렇게 한 해 끝을 맞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오비에스>의 멜로다큐 <가족>이 전한, 늘 함께인 어느 70대 부부 이야기다. 이들은 집을 나서면 언제나 손을 잡고 다닌다. 몇 년 전부터 시력을 잃고 있는 할아버지는 시각장애인 1급이다. 할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 할아버지는 왼쪽 몇 걸음 오른쪽 몇 걸음이면 엘리베이터, 계단은 몇 개 이렇게 기억하며 쓰레기 분리도 한다. 그래도 더 멀리 가려면 할머니가 없으면 안 된다. 할머니는 남편이 없는 사이, 장을 보겠다고 슈퍼에 나가선 집을 못 찾는다. 사그라지는 육신과 기억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고 있는 노부부는, 몸이 아픈 딸을 만나러 전철을 타고 가는 2시간 내내 정성스레 담근 김치를 행여 잊을까 끊임없이 김치통을 확인한다.
우리나라 치매 인구는 지난해 약 58만명. 보건복지부는 2025년이면 100만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한다.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른이 있다는 집안도 주변에 드물지 않다.
텔레비전을 끈 건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서이기도 했다. 밤에 쿵 소리가 나 달려가면, 할머니는 엄마에게 “영희가 침대에서 밀었어”라고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가족을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그리 심한 정도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토록 정갈하고 멋쟁이시던 할머니가 당뇨로 내 팔보다 가는 다리를 한 채, 금방 식사를 하고도 ‘밥을 안 줬다’ 같은 ‘거짓말’을 하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떨 땐 짜증도 났다. 그때부터 내겐 치매에 대한 ‘공포’ 같은 게 생겨났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신체기관이 낡듯 자연스레 나타날 수도 있는 인지력 저하가 아니라, 마치 걸려선 안 되는 무서운 ‘병’으로 말이다.
얼마 전 <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읽다가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치매의 70%를 차지한다는 알츠하이머. 그런데 미국에선 의사들이 1970년대 중반 이 병을 ‘질환’으로 인식한 뒤 30년 사이 사례가 10배 이상 폭증했다. 도쿄대 의대 교수 출신으로 치매 환자 완화치료에 매달려온 저자 오이 겐은 알츠하이머란 질환이 실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심과 걱정의 근저에 깔린 공포가 옛 모습 그대로인 대상에 질환이란 별칭을 덧붙인 것”이라고 말한다. 타이나 베트남, 일본 오키나와같이 ‘느긋한’ 문화가 남아 있는 곳은 인지력 저하라는 중심증상이 있어도 야간 배회, 망상, 공격성 같은 주변증상은 없는 단순치매가 많다고 한다. 하긴 그렇다. 예전엔 노인이 길을 잃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제 부모처럼 집을 찾아 줬지만 파편화된 현대 도시 사회에서 환자의 간병은 오직 가족에게 달려 있다. 이런 상황이니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노인들의 극단적인 선택까지 나타난다.
연초 한 스타 가족의 ‘비보’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국가가 돌봐야 한다는 목소리, 맞다.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다. 더불어 치매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것, 형벌과 같은 병이 아니라 나이 듦에 따라 겪을 수 있고 주변 관계에 따라 증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단절되어가는 시대, 치매는 복지뿐 아니라 사람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까지 던져주고 있다. 오이 겐은 환자와 감정을 나누는 ‘가짜대화’나 상대방 세계의 ‘비밀번호’로 말 걸기 등 마음을 여는 커뮤니케이션을 권한다. 그 작은 시작은 어느 드라마 제목마따나 ‘따뜻한 말 한마디’일 것이다.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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