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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대통령의 머리핀 / 김영희

등록 2014-05-07 19:03

김영희 문화부장
김영희 문화부장
박근혜 대통령은 언제나 단아하다. 단정한 옷이나 침착한 몸가짐, 표정 같은 게 작용할 텐데,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올림머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미용실에서 행사용 머리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스타일의 비밀은 엄청난 숫자의 실핀에 있다. 정당에 오래 출입한 기자들이라면 몇번씩 들었다는 이야기. 대통령이 되기 전, 미국 방문 길에 공항 검색대를 그가 통과하는데 삐~소리가 났다. 돌아나와 다시 통과해도 삐~. 결국 찾아낸 게 머리에 꽂힌 실핀이었다. 검색대를 몇번씩 오가면서도 그는 단 한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 대통령이 얼마나 원칙을 잘 지키는 분인지’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고 한다.

지난달 17일 진도체육관 단상에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머리는 몹시 헝클어져 있었다. 사고해역 해경경비함정에서 곧장 달려온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방송 생중계가 예정된 자리에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선 것은 얼마나 그가 이 상황을 급박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셈이 됐다.

나는 지금 대통령을 이해해보고자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는 거다. 이런 참사 속에 이해할 수 없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건 국민으로서 불행한 일이다. 지난해 쓰촨 야안 대지진 때 당일 현장에 달려가 천막에서 지휘를 했던 중국 지도자와 달리, 경호원들이 무대 아래 인간병풍을 친 채 마이크를 쥐고 장관과 해경청장에 대한 지적으로 일관해도 이해하려고 했다. 세월호가 아직 바다 위에 나와 있던 그때, 대통령의 한마디가 구조작업을 제대로만 하게 할 수 있다면 … 하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그 뒤는, 모두 아는 바다. 청와대는 이내 ‘컨트롤타워’ 논쟁에 돌입했다. 법적으로 청와대가 컨트롤타워네 아니네, 그게 그리 중요한 건지 잘 모르겠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논란이 정치적 자살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청와대 신문고에 청해진 고발이 있었다’는 <한겨레> 기사에 ‘청와대 신문고’란 없다며 브리핑을 하고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것까지 보면 이건 ‘그분’의 뜻이거나 최소한 ‘그분의 뜻’을 알아서 섬기다 주변사람들의 상식이 마비돼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이해하려 애써보자면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사람과 사고 중에 사고, 원인과 책임 중에 원인만 있는 것 같다. 시스템의 미비, 안전의식의 부재, 관피아 문제 등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이는 자신만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이 ‘국가개조’라는 말로 총체화됐다.

2차대전 뒤 일본이 전쟁에 이르게 된 심리적 기반을 분석하며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책임의 정점인 ‘천황’이 책임지지 않는 일본 사회를 ‘무책임의 체계’라 불렀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선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는 무한책임 논리가 거대한 무책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한다는 것이다. 물론 바다 건너 나라의 전쟁책임 인식의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잔악할 정도로 무책임했던 선장과 선원들, 퇴선 판단을 끝내 배 쪽에 미루는 해경, 책임을 폭탄 돌리기 하는 정부조직 그리고 컨트롤타워 논란을 지켜보며 이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원인을 목도하면서도 어떻게 책임(형사적 책임이 아니라)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선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지 못하다.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논하며 ‘무책임의 체계’에 대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천황의 책임이 명확해질 때에만 개개인의 책임이라는 문제가 부상한다.”

4일 팽목항을 찾은 박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이번엔 흐트러진 머리카락보다 훨씬 강력했다. 늦었지만 그 말의 무게를 보여줄 책임이 이제 그에게 있다.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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