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엄청난 연봉과 보너스를 챙기는 금융사 경영진들에 비난이 빗발치자 월가의 참새들이 이렇게 항변했다. “우리보다 더 많은 국민세금을 챙겨가는 건 미국 대통령이다.”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한복판에 132개의 방이 딸린 대저택을 임차료 한푼 내지 않고 산다. 움직일 때는 대당 5억원이 넘는 승용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 때는 한번 뜰 때마다 시간당 5만6800달러(약 6174만원)가 드는 전용기를 이용한다. 물론 여기엔 ‘4년 동안’이란 단서가 달려 있다.
대통령제에선 ‘국정운영의 축’이 대통령이기에, 대통령 한 사람에게 들어가는 예산은 내각제 총리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청와대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 무렵 들여왔다는 최신 헬스기구의 값이 약 8800만원이다. 여기에 3급 비서관으로 채용된 유명 트레이너의 연봉(3급 기준 약 7천만원)을 합치더라도, 대통령 건강을 위해 쓰는 돈은 연 1억원 정도다. 사실 전직 대통령들도 건강과 안전을 위해 그 정도의 예산을, 때론 그 이상을 썼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가족이 사용하는 작은 수영장을 상춘재 옆에 새로 지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년에 한두 차례 이용하는 국군 서울지구병원 내 대통령 전용 병실을 첨단 시설로 개조했다. 국회에서 이게 문제된 적은 없다.
요즘 청와대 헬스트레이너가 논란이 되는 건 ‘박근혜 청와대’의 태도 때문이다. 대통령이 건강 챙기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닌데, 자꾸 숨기고 거짓말을 한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누구도 알아선 안 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며, 발설해서도 안 되는 일급기밀로 취급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보다 훨씬 비밀스럽다. 그러니 “대통령은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이고 주무시면 퇴근”이라는 청와대 비서실장의 희한한 국회 답변이 거리낌없이 나온다. 유명 연예인들의 신비주의야 몸값 올리기라는 뚜렷한 목적이라도 있지만, 대통령의 신비주의는 자기도취 외엔 그 누구의 지지나 공감도 얻기 어렵다. 안갯속의 흐릿한 그림자는 주변에 두려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믿고 따를 만한 존재는 아니다. 자꾸 박 대통령 심기를 건드리는 때 이른 개헌론이나 차기 대선 후보 논란의 진원지가 야당이 아니라 집권세력 내부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4일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지지율이 34%다. 재임기간 중 최저치다. 그의 남은 2년은 말 그대로 ‘레임덕’이다. 오바마에 비하면 50%를 넘나드는 박 대통령 지지율은 낮은 게 아니고, 레임덕을 말할 시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여권 깊숙한 내부에서 먼저 ‘차기’를 거론하는 건, 박 대통령 지지율이 결코 견고하지 않으며 어느 순간 한꺼번에 꺼질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개 바깥을 자꾸 휘저어보며 개헌을 말하고 차기 대선 후보를 거론한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의 박 대통령을 만났던 국회의원들은, 박 대통령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더 무서웠다고 말한다. 그의 카리스마는 ‘박정희의 딸’이란 후광에서 발현해, 외부와의 접촉면을 최소화하는 행보를 통해 극대화했다. 기원 직후 사도 바울은 카리스마(Charisma)란 단어를 ‘신의 은총의 선물’이란 의미로 썼는데, 그 무렵의 사도 바울은 예언자나 신비주의자, 주술사로 이해됐다. 신비주의와 모호함은 박 대통령의 정치적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이젠 그의 발목을 잡는다. 여든 야든 정치권과 대화하지 않고 국민이 궁금해하는 사안에 입을 다무는 태도가 역설적으로 레임덕을 재촉하고 있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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