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돈과 힘-중국의 부강을 이끈 11인의 리더>를 쓴 중국 전문가 존 델러리와 오빌 셸은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 개혁가들의 머릿속을 지배한 화두는 부국강병의 꿈이었다”고 했다. 쑨원과 마오쩌둥, 장제스, 덩샤오핑 등 중국 주요 지도자들은 근대의 서구 열강에 당한 ‘치욕’을 원동력 삼아 다른 가치보다 부강이라는 핵심 ‘이익’을 추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결국 한 세기 남짓 만에 두 마리 토끼를 손에 쥐었다고 분석했다. 올해 중국의 국방비는 155조원에 육박했다. 저자들은 말미에 “중국은 그토록 갈망하던 부강을 달성했지만 이보다 더 손에 넣기 어려운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며 “바로 국제사회로부터 존중과 존경을 받는 것, 문화적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라고 했다.
올해 춘절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인 ‘춘완’(春晩)을 둘러싼 논란은 이런 지적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게 했다. 춘완은 단일 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를 지닌 블록버스터급 쇼다. 중국 인구의 절반가량이 시청한다. “섣달그믐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둘러앉아 만두를 빚어 먹으며 춘완을 보는 것이 최대의 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춘완은 현대 중국의 설 풍속으로 자리매김했다.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중국의 1년치 국정과제를 내보이는 자리라면 춘완은 중국 문화의 현주소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무대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도 춘완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가수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올해 춘완은 그야말로 죽을 쒔다. 시청률은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시청 기준으로 28%를 기록해 사상 처음 30%에 못 미쳤다. 다른 방송까지 포함해 시청한 인구 역시 6억9000만여명으로 처음으로 7억명을 밑돌았다. 내용 면에서도 낙제였다. 못생긴 여성을 개그의 소재로 이용했다는 여성 비하 논란은 물론 한국과 일본 프로그램을 베꼈다는 표절 논란이 일었다. 한 중국인 시청자는 “20년 동안 본 춘완 가운데 최악”이라고 혹평했다.
외국인인 기자의 눈에도 유독 올해 춘완은 지루했다. 중국 서부 소수민족의 춤과 노래를 소개하는 꼭지에는 시진핑 정부의 국정과제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함께 일컫는 말)라는 말이 등장했다. 중간에는 쇼라는 장르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시진핑 주석의 현장 시찰 자료화면이 방영됐다. 전체 춘완 가운데 만담을 비롯한 세 꼭지의 주제가 부정부패 척결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가요 대상 프로그램에 ‘창조 경제’와 대통령의 시장 방문이 들어간 꼴이다. 지난해만 해도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나’라는 노래와 함께 20년 동안 노쇠하는 아버지와 성장하는 딸의 사진을 슬라이드쇼로 보여주며 감동을 선사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느끼한 ‘관제’의 냄새는 눈길을 방송 화면에서 거리의 폭죽놀이로 돌리게 했다.
춘완의 쇠퇴는 중국의 사상, 언론 통제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집권 3년차를 맞는 시진핑 정부는 비판적 지식인 통제, 민주주의와 자유 등 서구 보편사상에 대한 대학 강의 금지 등을 통해 생각의 틀을 옥죄어 왔다. 춘완의 제작진도 가랑비에 옷 젖듯 상상력과 독창성, 창의력을 상실하고 스스로 자기검열에 걸려버린 게 아닐까. 일찍이 마오쩌둥이 언급했던 것처럼 ‘예술가가 당과 국가를 위한 나팔수’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돈과 힘>의 저자는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된 행사나 이미지는 (자발적인) 소프트파워의 위력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썼다. ‘중국의 꿈’에서 ‘다른 중요한 무엇인가’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면 그 꿈은 멋이 없을 것 같다.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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