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뒤편에서 만리재를 넘어 서부역까지 이어진 주택가는 언뜻 보기엔 서울의 여느 주택가와 다르지 않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세대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전형적인 서민 밀집주거지역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일반 주택가와 다르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헝겊을 가득 채운 대형 쓰레기봉투가 곳곳에 놓여 있고, 비닐관을 통해 집에서 흘러나온 증기가 길바닥을 적신다.
“여기 다세대주택들의 지하와 1층은 대부분 ‘제품공장’(소규모 봉제공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비닐관에서 증기가 흘러나온다는 건 안에서 다리미를 쓰고 있다는 얘기죠.” 이 지역 출신 허정행 마포구의원이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다세대주택 지하나 1층 문을 열면 어김없이 네댓명이 재봉틀에 앉아 옷을 만들고 있다. 이런 가내공장이 공덕·만리·서계동 일대에만 줄잡아 2천~3천곳은 된다. 대다수는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아 서울시의 공식 사업장 통계엔 잡히지 않는다. 봉제업에 직접 종사하거나 연관 업종에 종사하는 인구만 족히 2만명은 넘을 거라고 허 구의원은 말했다. 아, 서울이 이렇구나. 20년 넘게 출퇴근하면서도 신문사 주변 주택가가 서울에서 손꼽히는 봉제공장의 메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요즘 이 지역이 들썩인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울역 고가 공원화 프로젝트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박원순 시장이 미국 뉴욕에서 직접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만리동과 남대문시장을 잇는 서울역 고가도로는 차도가 아닌 보행도로로 바뀌게 된다. 안전도가 D등급이라 어차피 철거해야 하는데, 철거 대신 녹지공원으로 바꾸겠다는 게 서울시 생각이다. 주민들은 전임 시장 시절에 낡은 고가를 철거하고 새 대체도로를 건설하기로 서울시가 약속했는데 이제 와서 그 약속을 어겼다고 반발했다.
이 논란을 처음 접했을 땐 보행로를 확대하겠다는 서울시 계획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차량 통행을 못하는 건 불편하겠지만, 회사에서 남산까지 걸어갈 수 있다면 근사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논쟁은 단순히 서울역 인근 주민의 교통 편의 문제가 아니다. 공덕동 일대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에겐 생계가 걸린 문제다. 서울 패션산업을 떠받치는 작은 봉제공장들엔 시간이 곧 생명이다. 동대문이나 남대문시장에서 주문받은 옷을 얼마나 빨리 만들어 납품하느냐가 중요한데, 고가가 폐쇄되면 시간 경쟁력에서 창신동이나 신당동에 크게 밀릴 것이라고 말한다. 대체도로 건설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서울시가 고가 프로젝트를 수립할 때 공덕·만리·서계동의 봉제공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행길’을 만드는 데만 신경썼을 뿐 그걸로 수만명의 생계가 위협받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서울시 도시안전본부 관계자는 “(봉제공장은) 경제진흥본부 소관이라…, 우리가 몰랐더라도 그쪽에선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때 재선에 도전한 박원순 시장에게 새누리당은 “한 게 없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유있게 재선에 성공했다. 일의 성과보다 시민과의 소통을 평가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고가 공원화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박 시장이 대선 때문에 이 프로젝트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반문한다. 지방선거 공약이었다는 설명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간극 또는 오해를 넘어설 책임은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에게 있다. 서울시도 늦었지만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박 시장이 19일 직접 공덕동을 찾아 주민들을 만난다. 그가 대화를 통해 시민과의 거리를 다시 좁힐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박찬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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