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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왕정을 원하는가 / 박찬수

등록 2015-06-02 19:01수정 2015-06-02 19:01

영국 왕정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미국에서 왕을 떠올리게 하는 대통령제가 탄생한 건 흥미롭다. 사실 미국 건국 초기에 많은 인사들은 대통령이 ‘왕’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백악관을 지을 때 “왕궁을 연상케 한다”는 숱한 비판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미국이 대통령제를 택한 건 의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3개 주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권력의 중심이 되면, 버지니아·펜실베이니아 같은 큰 주들이 다수당으로 권력을 독점하지 않을까 작은 주들은 우려했다. 그래서 의회 바깥에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둠으로써 ‘힘의 균형’을 이루게 했다. 그 무렵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입법부 독재’였으리라. ‘견제와 균형’은 그렇게 대통령제의 본질이 됐다.

그로부터 200년이 넘게 흐른 뒤, 오랜 권위주의를 거친 한국에서 ‘입법부 독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리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서도 대통령 권한이 너무 커져 ‘제왕적 대통령’이란 신조어가 생겨난 마당에, 한국에서 ‘국회 때문에 국정이 마비된다’고 질타하는 건 뜬금없다. 정말 걱정해야 할 건 국회의 독주가 아니라 ‘국회 견제를 받지 않는 대통령’이다.

‘입법부 독재’란 허황된 조어가 어느 조간신문 1면을 장식한 건 지난주 국회법 개정안의 여야 합의 처리 직후였다. 모법을 벗어난 시행령이 문제인지, 아니면 잘못된 시행령을 고치라는 게 문제인지 굳이 다시 따질 생각은 없다. 궁극적으로 법률과 시행령의 불일치는 정부와 국회가 알아서 해결하면 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이걸 국정 마비와 국민 피해의 원흉으로 지목하면서 ‘국회의 월권’이 첨예한 정쟁의 뇌관으로 떠올라버렸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행정부 업무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국민에겐 피해가 된다고 믿는 듯하다. 행정부는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곳이고 국회는 당리당략을 위해 야합을 일삼는 곳이란 생각이 깔려 있는 탓이다.

이런 그의 시각이 새삼스런 건 아니다. 1975년 3월7일치 조간신문 1면엔 임시국회를 앞두고 여당 지도부를 향한 박정희 대통령의 훈시가 머리기사로 실려 있다.

“다수당인 여당은 다수 국민의 의사를 대변한다는 긍지와 다수 국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책임감을 투철히 인식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에서 임시국회를 운영해주길 바란다. … 과거에 여야가 막후 협상을 한다는 명목으로 귀중한 시간만 낭비했으며 마지막 고비에 가서는 정력마저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일이 없지 않았으니, 이런 나쁜 폐습은 지양돼야 한다. … 민주주의는 국민 동의를 그 근본 바탕으로 운영되는 것이고 현 체제는 투표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받았다. … 여야 관계에서 소수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명분하에 소수의 횡포에 끌려다니는 일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임시국회에선 민주주의 기본정신에 입각해 각종 낭비를 지양하고 능률적인 국회운영을 해주길 바란다.”

주어와 날짜만 바꾸면 지금 청와대 회의에서 나온 대통령 발언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국회와 여당을 바라보는 박 대통령 시각은 40년 전의 아버지를 꼭 닮았다. 그런데 지금 새누리당은 야당과 막후 협상이나 하며 정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박 대통령 심정이 어떨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법의 내용이 아닌 절차 문제로 대통령 거부권을 거론하는 과잉은 그런 심리의 표출이다.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시대는 변했다. 그리고 시대 변화보다 중요한 건 40년 전 아버지의 생각이 틀렸다는 점이다. 대통령제는 국회의 견제와 비판을 인정하는 틀 위에서 탄생한 제도다. 이걸 거부하는 순간, 왕정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박 대통령은 그 길로 가고 싶은 걸까.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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