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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메르스 퇴치의 비술 / 박용현

등록 2015-06-11 18:28

대통령의 직분은 여러 가지로 비유되곤 하지만 요즘만큼 ‘의사로서의 대통령’이라는 비유가 적절한 때는 없을 것 같다. 전 국민과 온 국토가 감염병의 공포에 떠는 환자가 됐고,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국가는 그 치유의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통령은 좋은 의사였나?

유감스럽게도 대통령은 처음부터 의사윤리를 어겼다. 의사윤리지침은 “의사는 진료의 요구를 받은 때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한다. 주치의인 대통령은 환자가 찾아온 지 2주 만에야 진료실에 나타나 남 일처럼 다른 의사들만 탓하고 돌아갔다. 사망자가 처음 나온 날에도 진료 현장 대신 창조경제혁신센터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보건의료의 기본인 방역체계는 후진국인데 성형외과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번창하고 중동에 의료 수출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창조적’인 의료 현실을 떠오르게 했다.

더 본질적이고 중대한 의사윤리 위반은 그다음부터다. 의사윤리지침은 “의사는 환자에게 질병 상태와 예후, 시행하려는 의료행위의 내용 및 효과 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제공한 뒤 동의를 받고 치료에 나서야 한다는 ‘정보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 원칙이다. 이는 인간이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명제에서 도출된다. 그러나 대통령은 감염병의 경로와 확산 양태를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환자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다. 대통령의 눈에 환자는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만 해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비쳤던 모양이다. 대형 의료사고로 이어진 오진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통령이 ‘괴담’이나 ‘유언비어’로 치부한 언설들은 기실 “아프다”는 환자의 아우성이요 “못 믿겠다”는 절망의 표현이었다. 그런 환자를 달래서 치료하지는 않고 감옥으로 보내버리는 의사를 의사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또한 “의사는 환자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관계가 유지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의사윤리지침 위반이다.

방치되는 환자를 보다 못한 서울시장이 특단의 처방을 내렸을 때 대통령이 ‘혼란을 일으킨다’며 비난하고 나선 것도 의사윤리에 맞지 않는다. 의사윤리강령은 “의사는 상호 간에 우애, 존경, 신의로써 대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개정되기 전의 강령에서는 이 부분을 좀더 강조했다. “의사는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그 능력을 갖춘 다른 의사에게 의뢰하여야 한다. 의사는 의학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시술을 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료 보건의료인들의 의료 행위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통치와 의사의 치료 행위는 비유 차원을 넘어 실제로 공통점이 많다. 국민과 환자에 대해 압도적인 힘의 우위와 권위를 누리고, 그들의 행복과 안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행동 원리도 비슷한 걸까. 의사윤리를 규정한 문서들을 살펴보면 마치 통치론 교과서처럼 읽힌다. 의사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헌신하는 자로 그려져 있다. ‘정보에 근거한 동의’ 원칙은 자신의 삶과 관련된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고 결정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 바로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와 통한다. 의사 상호 간에도 환자 치유를 위한 협조와 민주적 직무 관계를 강조한다. 지방자치제의 작동 원리가 바로 그렇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완력으로 제압하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국민의 복리를 최대한 증진시키는 민주적 방식이어야 한다.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의사로서의 대통령’이 명의의 반열에 오르느냐, 돌팔이로 전락하느냐를 가름하는 비술(秘術)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였다. 이 비술을 익혀 활용한다면 감염병도 머지않아 퇴치될 것이요 국민이 시도 때도 없이 화병을 앓는 근간의 증후군도 사라질 것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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