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서울 정릉 꼭대기에 있는 외갓집 현관에는 커다란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게 옛 대동강가 사진인 건 좀 큰 다음 알게 됐다. 어쩌다 외갓집에서 자게 되면 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평양에서 서울까지 38선을 7번 넘나든 이야기를 듣곤 했다. 마지막 등성이라고 해서 넘었는데 갑자기 구덩이에서 소련군이 튀어나와 돈을 주머니에 막 찔러주고 풀려났다는 대목에선 너무 조마조마해 주먹을 꼭 쥐었다. 해방 뒤 얼마 안 돼 서울에 온 할아버지에 이어 먼저 내려왔던 큰이모는 “38선 근처 온천에 피부병 고치러 간다 학교에 거짓말하고 얼굴에 빨간 칠 하고 붕대를 감은 채 왔다”고 했다. 어린 시절 나의 가장 큰 악몽은 자는 사이 북한이 쳐들어오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지난주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나온 6개항의 합의문은 이산가족 상봉에 ‘앞으로도 계속’ 문구를 넣어 정례화 희망을 갖게 했다. 이제까지 이산가족 직접상봉은 고작 19차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16차례였고,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지난해를 포함해 단 3차례뿐이다. 상봉 신청자 12만9000여명 중 생존자는 6만6000여명. 절반이 줄었다. 우리 외가처럼 등록하지 않았던 이들을 생각한다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할머니는 남은 직계가족이 1·4 후퇴 때 거의 다 내려온 데 반해, 할아버지는 조카 몇명 빼고는 대부분이 북한에 있었다. 1983년 <케이비에스>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보며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은 어렴풋이 있지만, 그게 끝이었다. 1985년 첫 고향방문단을 제외하면, 상봉이 시작된 건 한국전쟁 발발 50년인 2000년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사이 눈을 감았다.
왜 고향이 그립지 않았겠는가. 적잖은 이들은 사는 데 급급했다. 얼마 전 제3국행을 선택했던 인민군 포로 출신으로 60여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김명복 할아버지의 기사와 사진을 넘기다 울컥했다. 북녘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할아버지는 “미안하다”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브라질 농장에서 돼지를 닦아주던 젊은 시절 낡은 사진 한 장이 그 긴 그리움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자신만 도망치듯 빠져나와 가족들이 어찌 됐을지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하기도 두려웠을 이들도 있었을 게다. 반공이데올로기 서슬이 퍼런 시대를 살던 평범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북쪽 소식을 수소문하는 것도 엄두를 못 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을 때가 됐다. 일제 시절 일본 유학을 했을 정도로 부유한 만석꾼 집안 막내였던 할아버지는, 남쪽에서 번번이 사기만 당하고 평생 제대로 돈을 벌지 못했다. 대가족을 몇차례 나눠 남쪽으로 데려오고 7남매를 키운 건 돌아가신 할머니의 강인한 생활력이었다. 평소 할아버지가 고향 이야기를 거의 안 했던 건 그런 인생에 대한 회한 때문이리라. 어머니는 “조용한 네 할아버지가 노래를 참 잘했는데 꿈꾸면서도 대동강~ 그런 노래를 흥얼거렸어”라고 말했다.
네 살 때 38선을 넘어 어느덧 70대가 된 어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옛이야기를 자세히 묻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고 했다. 금강산이나 개성에 어머니와 갈 생각 한번 못한 나도 후회스러웠다. 관광이 재개되면 거기라도 꼭 가보자는 내게 어머니는 말했다. “지금 기력에 갈 수 있을지…. 그런데 화장대 위 네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 가슴에 꼭 안고 한번 가고 싶어. 가서 말하고 싶어. 엄마 아빠, 나 우리 고향에 왔어라고.”
남북은 위기 국면에서 서로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예상보다 더 큰 반전을 끌어냈다. 그런 자세라면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나아가 면회소 설치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우리 부모, 조부모의 수십년 눈물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닦아드릴 수 있기를.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김영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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