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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앤 해서웨이를 부탁해 / 김영희

등록 2015-10-04 18:44

(*영화 <인턴>에 대한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15년 전 한겨레신문사 입사동기가 육아휴직에 들어갈 땐 언론계 첫 남성 사례라며 기사화될 정도로 화제였지만, 요즘 우리 회사에선 육아휴직을 하는 남성 후배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얼마 전엔 임신·출산을 이유로 해고하거나 출산휴가를 주지 않는 사업주는 신고가 없어도 고용노동부가 직접 조사해 처벌한다는 발표도 나왔다. 대학입시부터 기업 채용, 국가고시에 이르기까지 여성 강세는 뉴스도 안 된다. 일하는 여성의 환경이 나날이 개선되는 건 분명하다.

요즘 인기몰이 중인 할리우드 영화 <인턴>을 봤다. 일흔살의 은퇴자인 남성 인턴과 서른살 스타트업 여성 최고경영자의 이야기는 예상 범위를 크게 넘지 않는다. 여성 시이오의 모자라는 점과 외로움을 요즘 남성이 아니라 ‘우는 상대방에게 건네줄’ 손수건을 챙기는 일흔살 젠틀맨이 메워준다는 구도다.

사실 로버트 드니로가 맡은 벤은 이상형의 극치다. 큰 기업 부사장까지 지냈지만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걸 두려워 않고, 젊은이들에게 꼰대처럼 굴지 않고 심지어 패션까지 댄디하다. 이에 비해 앤 해서웨이가 연기하는 줄스는 달랐다. 여성 리더에 대한 인식과 처지에 대해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만든 패션 스타트업을 18개월 만에 직원 216명의 기업으로 키운 줄스는 끝없이 자신이 ‘까다롭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전혀 까다롭지 않다. 사무실 한 테이블 위에 직원들이 쌓아두는 잡동사니를 보고 속에서 열불이 나도 치우라는 말을 뱉지 못한다. 딸의 일을 이해 못하는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또 역시 속에서 열불이 나도 겉으론 ‘사랑해요’ ‘금방 다시 걸게요’라 말한다.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는 저서 <린 인>에서 ‘젠더 디스카운트’라는 말을 한다. 직장에서도 여성이 공동체 작업을 좋아하고 남을 돕고 싶어하는 건 당연시되는 반면, 남성이 그러면 보답해줘야 할 덕목으로 인정받는다는 얘기다. 그는 “남성은 야심만만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성공하는 족족 칭찬을 듣지만,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여성은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한다”고도 말했다. 피해의식이라고? 실제 미국의 연구도 있다. 연구진은 하이디 로이즌이라는 성공한 기업인 사례를 한 그룹에는 원래 이름으로, 다른 그룹에는 하워드라는 남성 이름으로 바꿔 제시했다. 평가는 둘 다 유능했지만, 하워드는 인간적으로 좀더 매력적인 동료로 보는 반면, 하이디는 이기적이고 고용하고 싶거나 그 밑에서 일하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고 나왔다.

자신이 까다로운 사람이라며 양해를 구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하는 줄스는 이런 주변의 인식이 투영된 아주 리얼한 캐릭터다. 심지어 자신의 사업을 위해 전업주부를 자처했던 남편이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다른 여자를 만나자, 시이오 자리를 포기하려까지 든다.

정도 차는 있지만 어느 사회나 여성들은 스스로를 내세우는 걸 삼가도록 ‘키워진다’. 얼마 전 만난 정부 관계자는 여성가족부에서 실시중인 ‘여성인재 등록’ 사업의 참여율이 너무 낮다고 말했다. ‘비슷한 사업에 남성들은 내가 아는 누구도 등록해야 한다며 나서는데 여성들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사회 에디터
사회 에디터
샌드버그는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에서 “이 속도라면 기업 내 남녀 임원 비율이 같아지는 데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회의 다른 한편에선 적은 자본과 아이디어만으로도 스타트업 창업이 활발해지면서 ‘여성 보스’가 대거 출현할 가능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남성 중심의 기업 외엔 선택의 길이 없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조건이다.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 그런 변화에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김영희 사회 에디터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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