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인 스파르타는 패전국인 아테네에 ‘30인 참주’로 구성된 과두 정권이 들어서도록 지원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11년 벌어진 쿠데타에 이어 아테네의 자랑이었던 민주정이 끊긴 두번째 사태였다. 그러나 반대파를 숙청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등 폭정을 펼친 30인 참주들은 오래가지 못했고, 민주정은 1년 만에 회복됐다. 민주정이 회복된 뒤 훗날 아테네에서 가장 뛰어난 법정 연설문 작성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리시아스는 에라토스테네스를 법정에 세운다. 30인 참주 가운데 하나였던 에라토스테네스가 무차별적인 숙청 과정에서 자신의 형 폴레마르코스를 살해했던 일에 대한 죄상을 묻기 위해서였다.
연설 초반 리시아스는 “이전에는 피고에 대해 고발자들이 어떤 원한이 있었는지 드러내야 했지만, 지금은 피고들이 도시에 대해 어떤 원한을 지녔는지 알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사적인 일들로 인해서건 공적인 일들로 인해서건 모든 이들이 화를 낼 만한 점이 많다”고 말한다. 이 고발이 에라토스테네스에 대한 사적 원한에서 비롯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30인의 참주가 아테네 전체에 저지른 일들에 대한 공적 고발이라는 것을 못박은 것이다. 이어 그는 민주정을 유린한 인사들을 죄상에 맞게 단죄하는 것이 아테네의 미래라는 취지로 열변을 토한다.
리시아스의 고발은 실패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아테네에는 대대적인 사면령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고, 30인 참주들 가운데 일부는 아테네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기도 했다. 최근 이 연설문을 번역한 김기훈(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서양고전학)씨는 “‘과거 청산’이 민주정 내부에 잠재된 해묵은 정쟁과 더불어 쉽사리 해결되지 못했다”고 본다. 민주주의와 과거 청산의 원초적인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역사의 한 조각이다.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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