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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꽃보다 복면 / 김영희

등록 2015-11-29 18:33

어느 지인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제가 얼굴을 가린 이유.’ 그는 1차 민중총궐기대회 때 비니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썼다. 얼마 전 경찰서에서 피의자 진술조서를 썼는데, 지난 4월18일 세월호 참사 범국민대회 때 사진이 채증되었다는 이유였단다. 형사로부터 약식기소로 200만~300만원의 벌금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난감했지요. 부득불 이번에는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저는 재벌가 자손이 아니거든요’라고 그는 썼다.

의아했다. 내가 기억하는 성격이나 지금 직업이나 쉰이 다 된 나이나 뭘로 봐서도 쇠파이프나 각목을 휘둘렀을 것 같진 않은데…. 10년 만에 연락이 닿아 물었다. “뭘 했는데요?” “대학 민주동문회 깃발 들고 행진하는 게 시청 근처 폐회로텔레비전에 찍혔더라고요.” “단지 그거?”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더군요.” 그는 “국가가 부른 거니까” 경찰서에 가긴 했지만 “동의할 순 없기에”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했다.

2009년 작가 강풀은 지독한 감기에 걸린 사람이 귀갓길에 마스크를 쓰고 집회 현장을 지나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만화를 그린 뒤, ‘물론 이 사례는 SF이며 판타지이며 초현실적 대왕오바질이다’라며 당시 한나라당의 집시법 개정안을 ‘마스크법’이라고 비꼬았다.

며칠 뒤면 판타지를 현실에서 보게 생겼다. 2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예고된 12월5일, 시청이나 광화문 근처에 갈 사람들은 아무리 추워도 털모자를 쓰거나 목도리로 얼굴 가릴 생각은 않는 게 좋다. 폭력시위 가담 또는 불법시위 기도 예상자로 검문당하거나 격리될 수 있으니. 행진도 하기 전 차벽을 치는 ‘선제적’ 예방에 힘써왔던 경찰이 복면 쓴 사람들이라고 ‘폭력을 행사할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지난주, 참 숨가빴다. 대통령이 시위대를 아이에스(IS·이슬람국가)에 비유한 뒤, 그다음 날 복면금지법이 발의되고, 그다음 날 고등법원이 얼굴 가린 시위자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그다음 날 법무장관은 복면시위자의 양형기준을 올리겠다고 사법부를 제치고 선언했다. ‘복면=폭력’이라는 규정이다.

지난 14일 비에 젖은 길바닥에 앉아 있던 학교급식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60~70대 농민들이 대한민국을 마비시키고자 나온 것은 아니었다. 벼랑에 밀리고 밀리던 이들이 ‘살려달라’고 ‘얘기 좀 들어달라’고 애원하러 나온 자리였다. 결과적으로 13만명의 ‘목소리’를 덮어버리게 된 일부 폭력적 형태와 관성적인 시위 방식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다행히 주최 쪽은 2차 대회를 축제처럼 평화적으로 치르겠다며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사람벽’으로 평화의 울타리를 만들겠다며 다른 종교인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주최 쪽만 변하면 될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누구든지 폭행, 협박, 그밖의 방법으로 평화적인 집회 또는 시위를 방해하거나 질서를 문란하게 하여서는 아니된다’(3조1항)고 규정한다. 이 법의 본질이 집회·시위를 막는 게 아니라 최대한 보장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도 ‘집회와 시위는 본질적 특성이 주변 사람에게 불편을 줘서 이목을 끄는 것’이라고 했다. 효자동도 광화문광장 끝도 아니요, 청와대에서 수㎞ 떨어진 곳에 차벽으로 10만여명을 가둬놓고 꼼짝하면 벌금을 매기겠다며 참여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건 국가의 폭력 아닌가? 이러면서 복면이 사라지길 기대하는 건 난센스다.

미국이나 스웨덴,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복면금지법은 있다. 하지만 홍성수 교수가 페북에서 밝혔듯, 그런 사회에선 대통령이나 총리 사저, 의회 담벼락에 붙어서도 시위할 자유가 보장된다. 서구라고 매번 꽃을 든 시위만 하는 것도 아니다.

김영희 사회 에디터
김영희 사회 에디터
상대가 말로 하자는데 못 믿겠다며 때리는 사람은 보통 둘 중 하나다. 속이 좁거나, 검거나.

김영희 사회 에디터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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