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대한 인간의 감각은 날카롭다. 살인·강간·싸움과 같은 물리적인 폭력은 우리의 눈에 쉽게 포착되고, 이를 대하는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도덕적으로 분개한다’는 감정이 깔린다. 다양한 형태의 물리적 폭력들이 미디어에 많이 포착될수록 “폭력을 멈추라”는 긴박하고 필사적인 ‘에스오에스’(SOS, 구조를 위한 모스부호) 역시 넘쳐나게 된다.
슬로베니아의 급진주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에 대해 ‘에스오에스 폭력’이란 말을 썼다. 그는 폭력의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 가운데 에스오에스를 불러일으키는 폭력은 ‘주관적 폭력’, 곧 개인, 공권력, 군중 등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벌이는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은 ‘에스오에스 폭력’이 아니라 ‘폭력의 에스오에스’, 곧 주관적(subjective), 객관적(objective), 상징적(symbolic) 등 폭력의 세 가지 방식과 그들이 복잡하게 일으키는 상호작용 그 자체라고 한다. 주관적 폭력과는 다르게 객관적·상징적 폭력은 그 양상이 눈으로 보이지도 않고 폭력의 주체조차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구조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근본적이다. 집회 참가자들과 공권력 사이에 벌어진 폭력이 주관적 폭력이라면, ‘노동시장 유연화’가 가져온 노동조건의 악화는 객관적·상징적 폭력인 셈이다.
문제는 ‘에스오에스 폭력’이 언제나 ‘폭력의 에스오에스’를 은폐한다는 점이다. 이 작업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매스미디어다. 이들은 주관적 폭력에 대해서만 새된 목소리를 내지르며, 우리의 생각이 객관적·상징적 폭력에까지 닿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의 시야를 ‘폭력 또는 비폭력’이란 거짓 답안에만 머무르게 만든다.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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