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에 협력한 이력 때문에 고향에 은둔하던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는 1960년대 <파르티잔>이란 글을 내놓는다. 슈미트는 국가 사이의 정규전이 아니라 파르티잔, 곧 비정규군의 전쟁이 오늘날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1808년 스페인 인민이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싸운 것은 파르티잔의 시초로 평가된다. 제복도 없이 인민 사이에 섞인 비정규군은 주권국가 사이의 전쟁 규칙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전쟁을 이어갈 수 있다. 반면 동격의 국가를 상대하는 정규군에게는 인민 사이에 섞인 비정규군을 적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이런 비대칭성 때문에 “정규군은 결코 비정규군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나왔고, 나폴레옹은 “파르티잔에 대해서는 파르티잔으로써 싸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슈미트는 파르티잔이 ‘절대적인 적’이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누가 적이냐’를 규정하는 것은 전쟁과 정치의 기본이지만, 여기서 적이란 것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실제적인 적’ 개념이다. 그러나 파르티잔이 옛 유럽 신사들의 결투와 같은 전통적 전쟁 개념을 깨뜨린 뒤로는, 상대를 절대적인 파괴와 절멸의 대상으로 보는 개념이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이다. 대량살상무기의 눈부신 발전도 이러한 적 개념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다만 보수 이론가답게 슈미트는 그 혐의를 레닌이나 마오쩌둥 같은 혁명운동가들에게 일방적으로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절대적인 적’을 만들어내고 심화시킨 책임은 전지구적인 침략전쟁을 벌였던 서구 열강들에 먼저 묻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 역시 ‘절대적인 적’이라는 허상을 강화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우리에게도 자문이 필요하다. 다른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휩쓸려 ‘실제의 적’과 ‘절대적인 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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