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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수학 선행의 정석 / 전정윤

등록 2016-04-12 20:37

어느 나라나, 어느 과목이나 특별히 잘하는 학생이 있고 유난히 못하는 학생이 있다. 특히 수학은 인류의 천재들이 수천년에 걸쳐 발견한 수와 공간의 성질을 집약한 과목이라, 영재와 둔재가 나뉘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렇더라도 ‘수포자’로 불리는 고교 수학 기초학력 미달자가 20%에 육박하는 나라에서, 고교 수학을 선행학습하는 초등 고학년이 10% 가까이 되는 현실은 ‘기괴하다’고밖에 설명할 방도가 없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생 학부모를 만나 수학 사교육을 취재한 적이 있다. 고학년 때부터 선행을 시킬 요량으로 1학년 때 아이를 놀렸는데, 자신이 안이했다고 후회를 쏟아냈다. 아이의 친구들이 다닌다는 얘기에 부랴부랴 대치동 유명 연산학원에 갔더니, 초등 2학년은 늦었다며 받아주지 않았단다. 연산이야 집에서 해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연필로 세로셈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수학 선행학원에서 ‘연산이 더디고 세련되지 못해’ 높은 레벨 클래스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초등 1학년을 마칠 무렵이면 세자릿수 덧셈·뺄셈이나 두세자릿수 곱셈·나눗셈 정도는 가로셈 암산이 돼야 상위권이란다.

요즘 강남·목동 같은 사교육 지구에는 수학 학원을 서너개씩 다니는 초등학생이 많다. 연산·교과·선행·사고력으로 특화된 학원이 모두 별개고 숙제도 많다.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화되고, 대입에서 수학 영향력이 확대되고, 취업에서 문과 홀대 이과 우대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예견된 ‘수학 사교육 이상 과열’ 현상의 살풍경이다.

사실 수학은 개인차가 큰 과목이라 같은 학년이라도 모두 똑같은 교육과정만 강요하는 건 무리다. 선행학습이든 후행학습이든 학교에서 학생들의 필요와 수준을 ‘진단’하고, 그에 따른 진도와 문제 수준과 교수학습 및 평가 방법을 달리 ‘처방’해 주는 게 공교육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학급당 20~30명 공히 교과서도 선생님도 시험문제도 하나뿐인 우리나라에서 이상은 멀고 학원은 가깝다. “학생마다 증상이 다른데, 학교는 종합비타민 하나 처방해주고 알아서 치료하란다”는 학부모들의 볼멘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학교가 잘못했든 학부모의 각자도생이 지나쳤든 이미 공교육 궤도를 저만치 이탈한 학부모들한테 “선행학습은 안 된다”고 말해봐야 부질없다. 다만 선행을 하더라도, 해도 되는 아이와 하지 말아야 하는 아이 정도는 부모가 분별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수학교육 콘텐츠 개발 업체인 ‘노리’(knowre)의 김서준 부대표한테 들은 얘기가 수학 선행학습 판단의 ‘정석’인 듯싶었다.

전정윤 국제뉴스팀 기자
전정윤 국제뉴스팀 기자
김 부대표는 학부모들이 선망하는 과학고와 명문대를 나온데다 베스트셀러 수학 학습서의 공저자다. 그 때문에 “선행학습을 어디까지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의 대답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지금 하는 거 잘하면 선행하면 좋고요, 지금 하는 걸 못하면 선행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부모 욕심에 무리한 선행을 하게 되면, 아이는 이해도 못하면서 학원에 앉아 있게 된다. 이해를 하든 못하든 초·중생 때 학원에서 고교 문제집을 풀다 보면 학교 수업은 우스워 보인다. ‘겉멋’이 들어 수업시간에 집중을 안 하고 시험을 망치는 악순환에 빠지는데, 전형적인 ‘수포자 코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학부모들한테 간단한 ‘선행 테스트’를 권했다. 시중에 있는 문제집을 아이에게 주고 선행 중인 부분의 단원평가를 풀어보게 하라는 얘기다. 만일 70점이 안 나온다면? 당신의 아이는 지금 선행이 아니라 뒤로 되돌아가 ‘구멍’을 찾아 메우는 후행이 시급하다.

전정윤 국제뉴스팀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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