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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브라질 떡볶이 맛있나? /정세라

등록 2016-06-12 18:45수정 2016-06-13 20:24

“형들이 브라질 떡볶이가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래.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되면 꼭 갚을게.”

<응답하라 1988>(응팔)에선 동네 형들이 뒷골목에서 삥을 뜯던 ‘그때 그 시절’ 풍경이 나온다. 조선·해운 구조조정을 앞두고, 12조원의 종잣돈 가운데 10조원을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서 내놓기로 했다. 한은 노조는 이 상황을 카드뉴스로 풍자하면서 ‘응팔’의 삥 뜯는 장면에 빗댔다.

응팔의 떡볶이 값이야 고작 몇백원이겠지만, 현실의 떡볶이 값은 천문학적이다. 정부는 국책은행 부실을 메워야 할 돈이 5조~8조원 될 것 같으니, 넉넉잡아 12조원을 준비해놓자 한다. 그나마 이게 전부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12조원이란 어떤 돈인가. 우리 5천만 인구가 머릿수대로 나누면 24만원씩 돌아간다. 우리 집 세 식구는 70만원이 생길 테고, 옆집은 네 식구니까 100만원이 생기겠다. 또 19~29살 청년층에 한 달에 30만원씩 일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도 있다. 편의점 김밥을 먹던 친구들이 백반집을 가고, 창문 없는 고시원에서 볕과 바람이 드나드는 방으로 이사를 결심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은은 이런 엄청난 돈을 찍어내기로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금리도 내렸다. 누군가는 얘기할 것이다. 어차피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시대 아니냐고, 돈을 풀어 인플레이션이 생기고 경기를 부양하면 좋은 것 아니겠냐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결단이 부실해진 기간산업에 미래를 열고, 제대로 경기부양을 해서 모두에게 선순환이 된다면 국민이 삥 좀 뜯겨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삥을 뜯길 땐 뜯기더라도 계산은 정확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어떻게 삥을 뜯겨야 하는 건지, 뜯어간 돈으로 브라질 떡볶이를 사 먹을 형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사 먹고 훌륭한 사람이 되긴 되는 건지,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내 돈을 갚으리라 믿어도 되는 건지…. 이 모든 걸 건너뛰자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실제 인플레란 국민 전체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내 주머니의 1만원으로 빵 10개를 살 수 있는데, 내일 돈값이 떨어져 9개만 살 수 있다면, 그건 삥을 뜯긴 것이다. 그나마 내린 금리가 경기를 부양해 내 월급도 오른다면 감수할 만하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렇게 선순환이 된다는 확신이 없다. 한은 총재마저 금리 인하만으로 경기회복을 할 순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기대했던 경기부양 대신에 전셋값과 집값이 치솟는 부담만 떠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엄청난 한은 돈이 수혈된다 해도 조선·해운 산업이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다. 정부 시나리오대로 2018년에 글로벌 조선 경기가 회복세로 접어들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시한폭탄은 다시 째깍거릴 수 있다.

삥 뜯기는 처지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도대체 맛난 브라질 떡볶이를 먹는 형들은 누군가? 홍기택 산은 전 회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대우조선해양에 조 단위 돈이 계속 수혈된 과정에서 자신은 들러리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우조선을 비롯한 부실 자회사들의 꽃보직 인사권을 청와대, 금융당국, 산은이 똑같이 나눠 가졌다고 밝혔다. 파문이 커지자 진화에 나섰지만, 떡볶이를 먹는 형들이 누구인지는 뻔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정세라 경제에디터석 기자
정세라 경제에디터석 기자
20대 국회가 오늘 개원한다. 정부는 구조조정 종잣돈 마련 방안을 짜면서 일단 국회 검증을 피해갔다. 하지만 천문학적 떡볶이 값을 치를 국민을 위해선 구조조정 진행에 선량한 감시자가 절실하다. 또 떡볶이를 먹은 이들의 책임론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맛난 브라질 떡볶이를 생각하니 침이 고인다.

정세라 경제에디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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