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예술의 마지막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폴란드 출신 감독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1941~1996)는 말년에 ‘세 가지 색’이란 제목으로 연작 영화 세 편을 완성했다. 프랑스 혁명의 3대 가치인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삼색기의 색깔인 파랑, 하양, 빨강을 각 영화의 제목과 테마로 삼았다. 영화의 배경은 냉전이 끝나고 본격화한 유럽 통합에 대한 논의였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이 출범하는 계기가 된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1993년 11월 발효했는데, 이 연작의 첫 영화도 그해 가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다.
‘자유’를 주제로 삼은 첫 영화 <블루>에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여읜 여주인공이 나온다. 홀로 남겨져 괴로워하던 그는 죽은 남편의 뒤를 이어 유럽 통합을 기념하는 교향곡을 완성한다. ‘평등’을 주제로 한 두번째 영화 <화이트>(1994)는 부유한 서유럽 국가 프랑스 출신의 아내로부터 이혼당한 가난한 동유럽 국가 폴란드 출신의 남자가 벌이는 복수극을 다뤘다. <레드>(1994)는 다른 영화들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연작의 마지막 영화다. 늘 남을 도우려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여주인공이 겪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박애’란 무엇인지, 그것이 가능한지 묻는다. 감독의 시선 속에는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이 과연 유럽 통합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와 고뇌가 배어 있다.
불완전한 현실에 머물러온 유럽 통합은 이제 그 이상마저 의심받고 있다. 영국은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했고, 연쇄적인 탈퇴 움직임까지 우려된다. 날로 커져가는 불평등과 차별에 포위된 민중의 팍팍한 삶 속에서 ‘다양성 속의 하나’ 따위의 높고 고매한 이상은 길을 잃은 듯 보인다. 20여년 전 거장 감독이 던졌던 묵직한 물음이 무색하게도, 결국은 ‘각자도생’이 자유, 평등, 박애를 대신하는 유럽의 시대정신이 되고 말 것인가?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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