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공감과 감정이입 / 최원형

등록 2016-09-06 17:17수정 2016-09-06 19:10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투게더>란 책에서 개인주의에 갇힌 근대인들이 잃어버린 ‘협력의 기술’을 되찾자고 제안한다. 마지막 대목에 ‘몽테뉴의 고양이’가 나온다. 모든 것들과 대화를 시도했던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는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고 물었다. 여기엔 완벽히 파악할 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들어 있다. 서로를 어쩔 수 없는 존재인 타인과 나는 과연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란 덕목에 주목하는데, 세넷은 ‘공감’(sympathy)과 ‘감정이입’(empathy)을 구분한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타인과 나의 차이를 대하는 방법에 있다. ‘함께’(sym)라는 접두사에서 보듯 공감은 “당신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낀다”고 말하며, 나와 타인을 동일시하는 상상을 동원해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감정이입은 타인의 내면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나의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나는 당신에게 열심히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태도다. 그래서 ‘안으로’(em)란 접두사가 붙었다.

몽테뉴와 고양이는 서로의 마음속에 무엇이 오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 사실은 이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데 결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세넷은 공감보다는 감정이입이 협력의 중요한 열쇠라고 주장한다. 동일시에 기반을 둔 공감은 ‘더 강한 감정’이지만, 감정이입은 내가 결코 동일시할 수 없는 수많은 타인들과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더 강력한 실천’이 된다. 감정이입은 물론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언제나 타인에게 관심을 쏟고 대화를 이어가려는 태도와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circl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