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루마니아 혁명 때 쓰였던 ‘구멍 뚫린 깃발’. 국기 가운데 있던 공산주의 상징 문장을 동그랗게 도려냈다. 출처 위키미디어
1989년 12월 현실 사회주의 정권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동유럽 혁명’의 물결은 헝가리, 폴란드 등을 거쳐 루마니아에 닿았다. 우상화 정책까지 동원해 독재정권을 유지해왔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는 민주화 요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동유럽에서 벌어진 유일한 유혈사태였다. 그러나 군대까지 가담한 거대한 혁명의 흐름은 막을 길이 없었다. 당도 관료도 독재자를 배신했다. 도망치려던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는 혁명군에게 붙들린 지 사흘 만인 크리스마스날,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총살당했다.
이 혁명 과정에서 사람들의 눈을 잡아끄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바로 ‘구멍 뚫린 깃발’이다. 루마니아 국기는 애초 파랑, 노랑, 빨강의 삼색기였는데, 1947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부터 국기 가운데에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별이 담긴 문장을 넣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와 공산주의 정권의 폭압적인 독재에 치를 떨었던 루마니아 시민들이 그 문장만 동그랗게 도려낸 국기를 손에 들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구멍 뚫린 깃발의 원조는 과거 1956년 헝가리 혁명에서 등장한 바 있다. 스탈린식 전체주의 압제에 맞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당시 헝가리 공산당과 소련군에 맞선 시민군은 국기에서 공산주의 문양을 동그랗게 파낸 깃발을 썼다.
구멍 뚫린 깃발을 두고, 동유럽 출신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과거의 헤게모니적 권력이 사라졌으나 아직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지 않은, 중간적 국면의 열린 특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중간적 국면은 결국 지나가고 말 것이고, 아마 깃발의 구멍은 새로운 무엇으로 메워질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대한 과제는, 우리 스스로가 깃발의 구멍을 메울 새로운 무엇이 되는 것이다. 다만 그 자리는 원래 텅 비어 있다는 사실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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