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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190만 3개의 촛불 / 정세라

등록 2016-11-27 18:22수정 2016-11-27 19:06

정세라
경제에디터석 정책금융팀장

광화문 집회에 가서 ‘오뎅’도 사먹고, 박근혜 퇴진 풍선도 받고, 아빠 목말 타고 촛불바다도 구경하고…. 다섯살 아들은 몇 차례 집회 나들이에 박근혜, 최순실, 안종범 이름을 줄줄 꿰게 됐다. 신라시대에도 선화공주의 통정 의혹을 동네 애들이 먼저 ‘서동요’로 불렀다더니, 우리집 코흘리개도 ‘하야가’(윤민석 ‘이게 나라냐’) 후렴구가 입에 붙었다. “하야 하야 하야 하야하여라, ○○○는 당장 하야하여라~” “하옥 하옥 하옥 하옥시켜라, ○○○를 하옥시켜라~”를 신나게 부르는데, 박근혜나 최순실을 넣어 부르다가 가끔은 엄마·아빠 이름도 집어넣고 깔깔거린다.

5차 집회에도 촛불 좀 보태려고 했더니, 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어 망설여졌다. 갈까 말까 뭉그적대다가, 아이가 촛불집회에 ‘놀러’ 가자고 조르기에 ‘못 이기는 척’ 현관을 나섰다. 양말을 두 겹 신기고, 목도리와 마스크를 안 하면 광화문에 못 간다고 을러대고, 헬로카봇 장난감 5개를 모조리 들고 가겠다는 걸 말리느라 진을 빼고…. 출발하려니 이미 본행사가 시작한다는 저녁 6시였다. 집회 출정이든 야외 나들이든 다섯살 꼬마를 데리고 하는 일은 도무지 속도가 안 난다.

애써 광화문에 도착했지만, 출정은 쉽지 않았다. 역시나 “배가 고프다”고 외치기 시작한 아들 때문에 현장을 코앞에 두고 근처 식당으로 철군을 해야 했다. 가수 양희은씨와 함께하는 ‘상록수’ 떼창도, 장엄한 8시 촛불 소등도 식당 테이블에서 온라인 뉴스로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으로 볼 거면 도대체 여길 왜 온 거야, 구시렁거렸지만, 이래저래 망설이다가 저녁 밥때를 못 맞춘 걸 자책할밖에….

식당을 나서니 1차 무대는 다 끝나버렸다. 2차 행사는 아이에게 너무 늦은 시간이라 촛불의 바다에 잠시 머물다 귀가할 일만 남았을 뿐이었다. 추위는 제법 매서웠다. 하지만 광장엔 우리 애보다 더 어린 꼬맹이들이 발개진 볼로 아장거렸다.

이들은, 나는, 왜 아이 손을 붙들고 찬 겨울 거리로 나섰을까? 광장에는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말고도 오만가지 정치적 의제들이 출렁거렸다. 사드 배치 반대, 성과주의 철폐, 개헌과 차기 정치적 리더십 창출…. 이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은 남녀노소 촛불들이 저마다 다를 것이고, 더군다나 어린애들은 그걸 알 만한 나이도 아니다.

적어도 정의에 대한 소박한 공감,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 이 두가지가 촛불을 키웠지 싶었다. 아이에겐 권선징악 동화를 들려주지만, 현실을 사는 어른의 마음은 곧잘 냉소에 사로잡힌다. 세상은 ‘내부자들’이 다 해먹고, 더 지독한 악당이 조금 덜 지독한 악당마저 잡아먹는 ‘아수라’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이가 좀더 크면, 그게 세상살이니까, 너도 좀 약게, 때로 부정의에 눈감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선뜻 가르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촛불은 알려준다. 세상은 정의에 대한 감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과거에도 앞으로도 정의가 매순간 승리하는 듯 보이진 않겠지만, 적어도 냉소에 잡아먹혀선 안 된다고, 그래야 더 나은 세상에 한걸음 가까워진다고….

정작 헛걸음 같은 나들이였는데도 후회스럽진 않았다. 가만있자, 5차 집회 참석자가 몇명이더라? 뉴스를 찾아보니 주최측 공식 집계가 전국 190만명이라고 했다. 그럼 우리 세 식구, 오늘 광화문에 안 갈 뻔했다가 머릿수 보탰으니까 190만명하고도 3명이나 더 간 거네. 그럼 우리집 비공식 집계로 190만 3명!! 그리고 아마 다음주는 200만 3명? 그다음주는 250만 3명쯤 되려나….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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