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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남재희 칼럼] 내가 만난 두 마키아벨리 ②

등록 2016-12-08 20:46수정 2016-12-0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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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와의 대화에서 특히 기억하는 것은 그의 식량 자급자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그는 자주 우리나라 쌀·보리 생산량을 구체적 수치까지 줄줄이 말한다. 그는 무슨 ‘주의’나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배격했다. 한번도 그의 입에서 주의나 사상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실사구시의 실용적 경제와 정치에 관한 개선책 이야기다.
남재희 언론인

② 이영근

이영근씨는 연희전문(연세대) 출신으로 해방 전후 여운형씨를 추종했던 사상청년이다. 해방 후 이씨는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치안대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단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치안유지는 매우 중요했다.

이씨의 형 이만근씨는 조병옥 박사 계통으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다. 여운형씨가 암살되어 그렇게 되었겠지만 그 후 이영근씨는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된 조봉암씨의 비서 자격으로 정치참모가 된다. 그리고 그때는 농민이 압도적 비중이었기에 농민 중심의 정당 조직에 착수해 그 책임을 맡았다. 우선 농민신문을 발행하기 위해 농민소설가로 유명했던 이무영씨를 편집책임자로 선정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청년단체를 단일화하기 위해 민족청년단을 대한청년단에 합병하려 하자 거기에 반발했던 부단장 노태준씨와 손잡고 농민협동조합 조직에 착수하려 했다. 노태준씨는 독립운동 사상 유명한 노백린 장군의 아들로서 광복군 제2지대장을 맡았었다. 그의 포석이 그럴듯하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충북 청주에서 출마했는데 그때의 구호가 이색적이다. “1일3식 완전보장”. 얼마나 실제적이고 서민들의 마음에 바로 와닿는 구호인가. 조봉암씨가 찬조연설을 했다. 그의 신당운동은 정권의 모략에 걸려 그는 일단 유죄 선고를 받았다가 나중에 무죄가 되었다. 진보당 창당 과정에서 그는 병보석으로 묶여 있어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진보당의 구성과 정강에 매우 비판적이다.

우선 조봉암씨와 서상일씨의 분열에 관해서다. 서씨는 대구 사회의 대표적인 인물로 한민당 창당 당시의 8총무 중 한 명이다. 사사오입 개헌 파동 후 민주세력이 단일정당을 만들려고 할 때, 조봉암씨의 합류를 놓고 조병옥, 김준연씨 등이 반대했음에도 서씨는 합류에 찬성한 이른바 대동단결파에 속했다.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조봉암씨의 측근인 이른바 약수동파라 불리는 주로 함경도 출신의 이명하, 김기철씨 등은 지주계급, 한민당 출신인 그와 함께할 수 없다고 배격, 결국 서상일계는 떨어져나가 민주혁신당(민혁당)을 만들게 된다. 이영근씨는 조봉암씨가 반드시 서상일씨와 진보당을 함께 해야 한다고 보았다. 약수동파를 모두 버리는 한이 있어도 서씨와 손을 잡았어야 한다고 단호하다. 그런 게 정치 책사의 결정적 판단 같다. “죽산(조봉암 아호)이 동암(서상일 아호)이란 갓을 썼어야만 했는데….” 그는 내내 아쉬워했다. 그의 아호는 창정(蒼丁)이다.

그리고 진보당의 정강에 ‘사회적 민주주의’가 들어간 데 대한 맹렬한 비판이다. 도쿄(동경)제국대학 정치학과를 나온 학자 이동화씨가 정강정책을 마련하면서 삽입한 것인데, 도쿄대학에는 유명한 가와이 에이지로라는 영국류의 사회민주주의자가 있어 그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영근씨는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 분단한국의 현실에, 더구나 한국 사회의 발전단계에 맞느냐는 것이다. 조봉암씨는 그때 ‘평화통일’과 ‘수탈 없는 경제’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다가 ‘사회민주주의’를 갖다 붙이려는 것은 당시 상황이나 단계로 볼 때 대중성을 잃는다는 비판이다. 나중에 진보당 역사를 정리한 정태영씨는 사회민주주의를 자랑으로 내세웠지만, 이영근씨의 정치적 판단이 현실성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냥 ‘대중정당’이 맞다.

진보당 일망타진이 있을 때 이씨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여 조봉암씨에게 귀띔하고는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또한 그때 밀선을 알선한 사람이 부산에 있던 이종률씨로 나중에 <민족일보> 초대 편집국장이 된다. 이영근씨는 해방 전후의 사상청년이기에 각계에 친구가 많았다. 남로당 서울시당 부책임자로 남로당의 폭력투쟁 지시에 불복하여 전향, 경찰에 투신하여 색출에 공을 세운 양한모씨 같은 이도 아주 절친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친구들에게서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짐작한다.

일본에서 조봉암씨 구명운동을 맹렬히 전개한다. 일본에 발을 붙이는 데는 독립운동가 원심창씨 등의 도움이 있었다. 이어서 청년층을 조직하여 대대적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한다. 처음에는 남북간에 중립적인 입장에서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친서울정부 쪽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때 운동 내부에서는 배반이란 비난이 나오기도 했단다. 그는 그의 조직체를 기반으로 처음에는 <통일조선신문>을 주간으로 내다가 나중에는 일간으로 <통일일보>(일본어판)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상대 일간신문 발행이라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성취한 것이다. 4·19 후 30대 초의 젊은 재일동포 청년 조용수씨가 서울에서 <민족일보>를 창간했을 때 막후에서 그를 지도한 것은 이영근씨다. 그리고 얼마간의 자금도 지원했다. 그것이 5·16 후 조총련계 자금으로 둔갑하여 조용수씨는 사형에 처하여진다. 나중에 재심에서 무죄가 되고 보상도 나왔지만… 이영근씨도 사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7·4 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그것을 환영하면서도 평화통일 3대 원칙 1)자주 2)평화 3)민족대단결에 왜 민주의 원칙이 빠졌느냐고 맨 처음으로 그 허점을 지적한 사람이 바로 이영근씨다. 흥분만 하던 당시 상황에서 참 냉철한 판단이고 지적이었다.

그는 통일일보 논설을 통해 동포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한편 일본을 방문하는 우리 정치인들과도 접촉, 모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하려고 애썼다. 그는 주일대사관의 중앙정보부 파견 공사와도 항상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에서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칠 루트로는 그 자리가 핵심적이라고 본 것이다. 조총련계의 모국방문 행사는 참으로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동포정책의 큰 전기였다. 그 아이디어가 이영근씨에게서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 주오사카 총영사였던 조일제씨의 건의에 의한 것이란 이야기도 유력하여 여기서는 결론을 보류하겠다.

그는 통일일보 지면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박 대통령을 평가하는 것은 좋은데 박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투쟁을 하는 김대중씨 등에게는 너무 지나치게 비판적이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균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박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그에게 민주적인 통치를 양보받으려는 저의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유신 이후에는 그런 설득을 주로 주일대사관 정보부 공사를 통해 열심히 했다. 그가 표현은 복잡하게 했지만 우리 정계에서 그때 내밀하게 운위되던 이른바 이원집정부제 방식 비슷한 해결책이었던 것 같다. 그의 마지막 노력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그의 처남인 최세현 고려대 교수가 중정 주일공사로 왔을 때 그를 설득해 김 부장이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하여 서울에 와서 머문 일이다. 그러나 청와대 안 암투에서 김 부장이 밀려서인 듯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한 많고 파란 많은 일생을 암센터에서 마감하고 도쿄 교외 사찰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와 비교적 접촉할 기회가 적지 않았던 내가 그와의 대화에서 특히 기억하는 것은 그의 식량 자급자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1970년대였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주 우리나라 쌀·보리 생산량을 구체적 수치까지 줄줄이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존절히 아껴 먹으면” 이제 자급자족은 되겠다고 낙관한다. 그는 무슨 ‘주의’나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배격했다. 한번도 그의 입에서 주의나 사상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실사구시의 실용적 경제와 정치에 관한 개선책 이야기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운영의 차원에서는 냉혹했고 현명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가까이 접할 수 있었던 신범식, 이영근씨는 그러한 면에서 현대의 마키아벨리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 사람은 여쪽, 다른 한 사람은 야쪽에서 어떻든 끊임없이 국가경영의 책략을 탐구하였고 지도자를 설득하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그리고 반쯤 넘게 성취도 하였다. 나는 그들을 옆에서 관찰만 한 일개 서생일 뿐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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