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다수’를 앞세운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절정을 이뤘던 1969년 11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침묵하는 다수’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전쟁의 이른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어 대통령이 됐으나, 북베트남에 군사적 위협을 계속 이어가 봇물처럼 터진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는 “특정 시각을 가지고 거리로 나와 자신의 시각을 나라 전체에 강요하려는 소수에 의해 국가의 정책 방향이 좌지우지된다면, 내가 미국 대통령으로서 했던 선서를 지키지 못하는 셈”이라며 “‘침묵하는 다수’인 바로 당신들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 역시 ‘침묵하는 다수’에 호소하는 전략을 썼다. 그는 2015년 유세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돌아왔고, 이제 우리나라를 되찾을 것”이라 하는 등 끊임없이 ‘침묵하는 다수’를 자극했고, 지지자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따위의 팻말을 들며 그에게 환호했다.
박근혜 정권의 어이없는 실체가 드러난 뒤 분노한 주권자들이 촛불을 들고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일각에서 ‘침묵하는 다수’를 집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 “국민 3%가 밤새 몰려다녔다고 ‘국민의 뜻’이 되나” 등의 궤변 속에선 ‘촛불을 들지 않은 침묵하는 다수의 뜻이 진정한 민의’라는 기대가 엿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침묵하는 다수’를 말하는 이들이 여태껏 ‘다수’를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데 주력해왔다는 사실이다. 배후세력의 ‘선전선동’에 ‘동원’되기 일쑤이고, 소수 엘리트의 지도 없이는 ‘천민 민주주의’로 세상을 분탕질할 회색 군중.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그동안 ‘다수’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이렇게 시종일관 주권자를 무시해오다 자기네 필요에 따라 ‘침묵하는 다수’를 찾는 태도는 공감은커녕 더 큰 분노만 불러일으킨다.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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