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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치맥의 나라에서 생긴 일

등록 2016-12-25 17:07수정 2016-12-25 22:39

정세라
경제에디터석 정책금융팀장

공장식 축산의 폐해를 몰랐던 바는 아니다.

하지만 대도시 소비자로 사는 삶에서 닭고기와 달걀의 생산 과정이란 의식의 시야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덕분에 별다른 저어함 없이 치맥(치킨+맥주)도 먹고, 삼계탕도 먹고, 계란찜도 먹으며 나날을 살아간다. 알고도 먹고, 모르고도 먹고….

요즘엔 대도시 소비자의 무신경으로도 기함할 만한 소식들이 날마다 들려온다. 조류인플루엔자(AI)의 전방위 확산으로 닭과 계란 공장의 살풍경이 날것 그대로 클로즈업돼 안방 미디어로 쏟아지는 탓이다.

2500만마리 살처분…. 아무려나, ‘명’이 아니라 ‘마리’ 아닌가 하고 넘어가려 해도 지나치게 많은 천문학적인 숫자의 생명이다.

‘공장식 축산’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돼 있던 육계와 산란계 농장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새삼스레 을씨년스럽다. 닭고기로 ‘출하’되는 육계는 부화부터 도살까지가 30일간이고, ‘대란’ ‘특란’으로 팔려 나가는 알을 낳는 산란계는 1년간 생육된다고 한다. 공장식 축산은 비용 최소화를 위해 대규모로 밀집사육하는 게 기본이다. 특히 알을 낳는 산란계는 닭 한마리당 A4 용지 한 장도 안 되는 면적을 제공하는 케이지를 층층이 쌓아 기르는 게 통상적이다. 계란 수거의 편리성에 초점을 맞춘 방식이다. 플라스틱 제품을 찍어내는 게 아니라 날갯짓하는 생명체를 길러내는 다음에야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이런 사육 환경에서 지내는 가금류는 야생 조류와 달리 에이아이 바이러스와 만났을 때 취약해 집단 폐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번 에이아이 확산에 알을 낳는 산란계의 피해가 유독 크다고 한다. 국내에서 7천만마리를 기르는데, 벌써 1700만마리를 살처분했다. 네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땅에 파묻은 셈이다. 유독가스를 주입해 죽였거나, 반쯤 죽인 닭들의 주검이 포클레인에 집혀 넝마처럼 실려나가는 모습을 방송 카메라로 날마다 보는 지경이다.

사실 에이아이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문제였을 뿐 2003년 이후 10여년을 이어져왔다. 이번엔 도시의 대규모 소비를 떠받치던 달걀과 닭고기 수급 시스템에 곧바로 충격이 올 만큼 단기간에 피해가 커지자 정부와 언론이 뒤늦은 호들갑에 나선 게 다른 점이다.

어차피 사람이 먹기 위해 기르는 생명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감각이 있는 생명체의 대규모 살처분은 그저 천재지변이나 경제적 손실만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생명권 존중 등의 차원에서 2012년 케이지 밀집사육을 금지한 유럽 사례를 빌리지 않더라도 국내 사육 시스템과 방역 체계,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연결짓는 가격결정 체계 등의 문제점을 전면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당장 가까운 일본의 경우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11월 중순께 에이아이가 발생했지만, 살처분 피해 규모는 우리가 2천만마리를 넘어갈 때 80만마리 수준으로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연의 몫 이외에 사람의 몫이 크다는 얘기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치맥’이라…. 영세 자영업자의 대표 격이 치킨집이고, 경기 한파에 장바구니 물가를 걱정해야 하는 마당에 이런 요구가 허영인 것은 아닌가, 씁쓸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최소한도의 생명권을 외면했을 때 인간의 건강권도 보장받기 어려웠다는 건 거듭 확인된 교훈이다. 닭들의 아우슈비츠가 해마다 벌어지는 나라에서 ‘전지현의 치맥’을 입맛 돋는 대표 상품으로 자랑하고 나섰다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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