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코닐리어스 휴스가 찍은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사진.
대통령 선거 후보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말한 것이 사람들의 입길에 올랐다.
정치적 노선의 한 갈래로서 ‘진보적 보수주의’의 유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건 아니다. ‘영국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가 선구적 인물로 꼽힌다. 그는 제40, 42대 영국 총리로서 노동계급의 선거권 확대, 교육·공공의료·노동조건 개선 등 일련의 ‘사회 개혁’을 이끌었고, 이는 귀족과 대지주의 이해에만 초점을 맞췄던 보수당의 지평을 전체 국가와 국민으로 확장시켰다. ‘일국 보수주의’, ‘토리(보수당) 민주주의’ 등으로 불리는 그의 정치적 노선에 대한 또 다른 평가가 바로 ‘진보적 보수주의’다. 지난해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임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는 ‘진보적 보수주의’를 아예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정치인이다. 38살의 나이로 보수당 당수가 된 그는 보수·진보 양쪽에 표심을 호소했고, 2010년 13년 동안 이어졌던 노동당의 장기 집권을 끝내고 제75대 총리가 됐다. 만약 디즈레일리와 캐머런이 닮았다고 주장하면, “‘진보적 보수’가 위기에 처한 보수를 구해낸다”는 식의 ‘보수 혁명’ 서사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말은 말일 뿐이다. 캐머런은 실질적으로 디즈레일리가 아니라 마거릿 대처의 길을 걸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 역할 축소와 사회복지재정 삭감을 뼈대로 삼는 전형적인 보수당 우파의 노선이었다는 것이다. 젊고 신선한 이미지를 앞세워 보수·진보 양쪽을 모두 공략했다는 점에서는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 비교된다. 그런데 블레어도 실질적인 정책 노선이 보수당과 비슷하다고 해서 ‘블레처리즘’(블레어+대처)이란 비판을 받았다. 이래저래 갖다붙이는 말장난 수준의 정치적 비전은 끝내 그 실체가 들통나기 마련이다.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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