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변혁의 의지와 현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간격이 놓여 있다. 그 간격을 잇는 것이 역사이고, 역사가 된 과제만이 불가역적인 것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새삼 돌아보게 된다. ‘적폐청산’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본질이다. “이것은 역사입니다!” 사업장평의회 교육위원의 첫마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독일의 임금체계를 설명하는 자리였다. 1997년 민주금속연맹(현재의 금속노조) 제도개선위원들과 함께 독일 킬(Kiel)의 하데베(HDW) 조선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독일 노동운동은 노동자정당-산별노조-지역본부의 위계로 이루어져 있고, 사업장평의회는 지역본부 아래의 현장조직으로 전체 조직체계의 최하위에 해당한다. 그래서 교육위원의 이 말은 독일 노동운동의 가장 아래쪽 뿌리까지 깊이 침투해 있는 운동원칙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당시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의미를 다소 추상적인 것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말의 의미가 송곳처럼 아프게 전달된 것은 6년이 지난 후였다. 2003년 6월23일 독일 금속노조는 금속사용자연합과 새로운 임금체계 협약을 체결하였다. ‘에라(ERA) 협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협약의 역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노동문제인 비정규직은 노동계급을 분할통치하는 자본의 전략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 이런 차별 전략의 고전적 기원은 1900년경 등장한 테일러주의의 생산직-사무직 분리다. 마르크스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라고 불렀던 원리의 응용이었다.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은 이 분할통치를 극복하는 데 있고, 그 첫 단추는 생산직-사무직의 구분을 철폐하는 것이다. 에라 협약은 바로 이 구분을 폐기하고 두 직군의 직무와 임금을 통합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의 계급적 전략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혁한 것이다.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은 자본 측이 어떻게 이런 협약에 합의했을까 하는 것이다. 교육위원의 말을 돌연 떠올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첫째 단서는 이 협약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협약의 기원은 1980년 폴크스바겐의 로디(LODI) 협약으로, 직무를 통합하는 최초의 협약이었다. 1982년 푀겔레 협약에서 숙련이 임금체계에 도입되었고, 이를 토대로 1988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지구에서 교섭이 시작되어 1989년 ‘임금체계 협약2’가 체결되었다. 하지만 1996년 사용자 측의 협약 파기가 있었고, 이후 협상이 재개되어 2003년에 협약이 체결된 것이다. 사업장 이전 과정을 거쳐 이 협약은 2011년 모든 사업장에서 실행에 들어갔다. 최초의 협약에서 마지막 실행까지 무려 30여년이 걸린 것이다. 둘째 단서는 자본진영에 대한 설득이다. 긴 협상 과정에서 노동 측은 자본 측의 요구를 끈기있게 청취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새로운 협약으로 비용이 증가하지 않도록 비용 중립의 원칙을 견지하였고, 유연화된 생산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셋째 단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 측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제안에서부터 이후의 숱한 수정안과 설득이 모두 노동 측에 의해 이루어졌다. 전해 들은 얘기로 1988년 협약을 위해 노동조합에서는 조합원들에게 6년의 일반교육, 2년의 집중교육을 하였다고 한다. 협상의 동력을 노동진영 내부에서 공급한 것이다. 이런 협약을 도로 물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협약은 말 그대로 ‘불가역적’ 변혁의 정석을 보여준다. 이 정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촛불 이후 새 정부의 조각이 완료되고 국정 방향 5개년 계획이 100대 과제와 함께 발표되었다. 정부의 말대로 ‘적폐청산’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의지를 의심하지 않더라도 이들 과제 가운데 막상 그대로 실현될 것은 많지 않을 것이고, 실현되는 것조차 다음 정부에서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속전속결로 못 박기에 그리 공을 들였던 두 전임 대통령의 4대강 사업과 국정교과서가 모두 지금 공수표가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터뜨렸던 김대중 대통령의 오열이 그것을 말해준다. 변혁의 의지와 현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간격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간격을 잇는 것이 역사이고, 역사가 된 과제만이 불가역적인 것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새삼 돌아보게 된다. ‘적폐청산’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본질이다. 당장 에라 협약에서 전해지는 단서만 돌아보도록 하자. 첫째, 이들 과제는 얼마나 오랫동안 추진되었나, 둘째, 반대세력을 설득할 밑천은 무엇인가, 셋째, 과제를 주도할 세력의 동력은 지속 가능한가? 우리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을까? 그 답을 다음 글들에서 이어서 살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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