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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 사람] 1812

등록 2017-09-07 17:46수정 2017-09-07 21:01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유럽 대륙을 거의 정복한 나폴레옹이었지만 바다 건너 영국은 끝내 목엣가시였다. 그러나 해군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영국에게 트라팔가르에서 이미 쓰라린 패배를 맛본 프랑스로서 해전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대륙봉쇄령이 발동되었다. 유럽 대륙과 영국의 교역을 금지시키는 조치였다. 대륙 모든 곳에서 동조한다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교역을 통해 나라 살림을 꾸려가던 지역에서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궁극적으로는 러시아 제국이 영국과 무역을 재개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할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병력에서 열세였던 러시아군은 싸우는 시늉만 하면서 퇴각하였다. 프랑스의 가장 큰 적은 원정군이라는 사실 자체였다. 한여름의 무더위, 보급 물자의 지연, 악화된 위생 환경 등으로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군에는 탈영병이 속출했다. 마침내 대규모의 전면전이 모스크바 서쪽 인근의 보로디노에서 벌어졌다. 서로 큰 사상자를 낸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퇴각했기에 프랑스군의 승리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것이 나폴레옹 몰락의 서막이었다.

프랑스군은 9월14일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러시아의 사자가 나와 그들을 맞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모스크바는 텅 비어 있었다. 시민들 모두가 이미 빠져나간 것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패잔병의 실화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숨어 있던 러시아군과 시민들이 방화를 한 것이었다. 18일에야 진화된 불은 도시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황제가 평화 조약을 위해 찾아오리라 기대하며 5주를 점령국의 수도에서 허송했지만, 찾아온 것은 동장군이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고된 귀향길에 올라야 했다.

70년이 지난 1882년에 초연된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은 그해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작곡자 스스로가 음악적으로 혹평을 내린 이 작품은 승리자 러시아의 관점으로만 본 서사시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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