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박김형준 사진가
구술생애사 <할배의 탄생> 저자 얼마 전 엄마의 옛날 일기장을 그녀의 장롱에서 발견했다. 여든다섯인 엄마는 인지장애증이 상당해서 일기장을 얻어 오기 좋았다. 1967년부터 1980년까지이니 서른다섯에서 마흔여덟까지다. 나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에서 대학을 졸업한 해까지고, 내 마지막 가출 직후에서 일기는 끝났다. “현숙아, 간밤 꿈에 너를 보았다. 너는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겠지. 歲月(세월)이 흐르고 생각을 하노라면 너도 나를 이해할 때가 있을 거다. 이해 안 해줘도 좋다. 나는 이 世上(세상)길을 피할 수가 없구나. 이게 사람들이 살아왔던 길이라면, 남들 하는 대로 그냥 울고 웃으며 따라가는 수밖에. 내가 어떻게 叛逆(반역)할 수가 있겠니?”(한자는 음 없이 적혀 있다.) ‘반역’을 떠올렸었구나, 엄마가. 스무살이 넘으면서 반복된 큰딸의 가출에 애간장을 녹이면서도, 자신이 못한 반역의 기미를 알아챘을까? 마음 한구석 부러워도 했을까? 나에 대한 엄마의 잔소리는 늘 “너는 왜 그러고 사냐?”와 “나도 너처럼 좀 살아봤으면 좋겠다”를 오락가락해왔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엄마를 마흔이 넘으면서야 존중하게 되었다. 그녀는 당신 몫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고, 인지장애증인 지금도 그렇다. 이전의 가출들과 달리 마지막 것을 나는 출가(出家)라고 불러왔다. 그래 봤자 다른 가(家)를 만들어 25년 후 다시 나왔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출가한 것은 내 생애를 요약하는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아버지를 미워한 힘으로 내 길을 만들었다.” 단지 혈육의 아버지를 넘어, ‘아버지’로 상징되는 세상의 모든 질서와 규범과 관점을 의심하며 반역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것들’은 거부했지만 내 것은 아직 만들지 못해 많은 방황과 혼돈을 거쳤다. 뒤늦은 내 글쓰기는 그 방황과 혼돈과 상처의 정리 작업이구나 싶다. “니가 요즘 책을 쓴대매. 나는 니가 그럴 줄 알았어.” 문득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온 엄마의 뜬금없는 칭찬이다. 일기는 온통 한 여자의 열정과 절망과 갈증과 절박이어서, 느리게 읽었다. 그 나이쯤의 내 내면이다. 상반된 선택을 한 두 여자의 내면은 고스란히 닮아 있다. 바글대던 갈등과 불평과 미움 속에서 온갖 돈벌이와 살림을 해대면서도 일기를 썼구나. 그래야 살 수 있었구나. 구로공단 근처 닭장 집 단칸방에서, 새벽이면 부엌 부뚜막에 둥그런 양은 밥상을 펴고 쪼그려 앉아 무엇이든 끄적거려야 했던 내 시절이 떠올랐다. 그러지 않고는 나를 놓쳐버릴 것 같았다. 일기에서 보는 엄마의 자책과 달리, 사실 나는 아버지와의 싸움에 집중하느라 엄마를 원망할 새도 바라볼 새도 없었다. 엄마의 딸로도 다섯 남매 중 하나로도 기억이 참 적다. 가족들이 찾아주는 내 지난 삶을 보며, ‘나 모르게 다들 나를 용서해줬구나’ 싶다. 그렇더라도 “용서”라니? ‘나 모르게 용서해줬구나’ 따위의 게으른 문장, 특히 족에 관한 이 몰계급적이고 비릿한 문장이 싫고, ‘용서’의 사방으로 갖은 불공정과 시시비비가 희번덕거리지만, 간략하자면 나는 족에게서도 세상에게서도 많이 용서받으며 살았더라. 내가 한 미움과 혼돈과 방황과 안간힘과 더불어, 엄마가 못했고 내가 한 반역과, 세상에게서 받은 용서 덕으로, 소위 독립이라는 걸 하고 있더라. 두 분을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는 나한테만 오만원짜리 하나를 굳이 쥐여준다. 무심코 엄마한테 물었더니 또 말짱해져서, “젊어서 너한테 한 게 미안한가 보지.” 귀 잡순 아버지한테 나도 미안한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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