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박김형준 사진가
구술생애사 <할배의 탄생> 저자 “미안해요.” 눈이 마주친 순간 아이는 그 한마디를 웅얼거리고 출구 쪽으로 비집고 갔다. 퇴근 시간이라 붐볐고, 지하철은 승강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열두 살 정도의 남자아이였다. 아이의 손이 내 지갑을 꺼내는 것을 본 순간, 표정을 꾸미며 아이의 눈을 향했다. 놀라지 않았음, 떠들 생각 없음, 이야기하고 싶음 등을 뒤섞어 얇은 미소까지 피웠지만, 일그러졌을 거다. 아이를 놓치고 남은 전철 내내, 내 표정과 ‘미안해요’를 복기했다. 표정 실패는 시리고 예리한 가슴 통증 탓이었다. 그날 밤, 엄마 돈을 훔치는 꿈을 꿨다. 전전긍긍하는 엄마를 보다 못해 훔친 돈을 내놓았고, 엄마는 돈 찾은 것만 좋아했다. 사오십년은 뒤로 간 어린 나는, 왜 돈이 필요했는지는 결국 묻지 않는 엄마를 속으로만 원망하다 꿈을 깼다. 안도는 잠깐이었고, 지난 저녁의 가슴 통증이 다시 왔다. 자괴는 공소시효도 없이 무의식 바닥에 말라붙어 있다가, 일상을 꼬투리 삼아 느닷없이 머리끄덩이를 틀어쥐고 돌려세워, 내 면상에다 수치스러운 나를 들이미는구나. 잠이 달아난 김에, 아이 이야기에 이어 꿈의 내용과 느낌과 생각들을 주절주절 스마트폰에 녹음했다. 말로 풀다 보니 내면의 계단을 타고 올라와 내게 묵은 흉터를 보여준 꿈이 고마웠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여덟 살부터 엄마의 돈 심부름에서 삥땅을 하며 시작된 내 도둑질은, 도벽으로 굳어졌다. 들킬 때마다 야단을 치면서도 엄마는 돈 심부름을 계속 시켰고, 정작 필요한 돈에는 야박했다. 학용품 살 돈을 타기 위해 부엌과 안방을 왔다 갔다 했고,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싸움의 원인이 나라고 생각했고, 도둑질이 시작됐다. 도벽은 자괴의 무저갱이었다. 고등학생이 돼서야 엄마의 잘못을 볼 눈이 생겼지만, 그때는 엄마의 사정들도 보였다. ‘스스로 스톱’은 불가능하다며 발각을 고대하면서, 위험과 쾌감을 탐닉하고 괴로워했다. 아버지의 것인 세상 질서는 거부했지만 내 것은 없는, 단절과 허기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자유를 맛 들였다면, 나와의 싸움인 도벽에는 늘 패배였고 자괴와 수치는 깊어갔다. 통곡과 다짐을 반복했다. 과 대표였던 대학 3학년 때 같은 과 학생의 돈을 훔치다 마침내 발각됐다. 발각 직후의 기억 한 덩어리는 아직 못 찾았다. 죽어지지는 않더라. 집과 학교에서 도망갔다 두어 달 만에 돌아왔고, 모두들 없던 일로 덮어주었다. 그 덮어줌을 ‘무조건적인 용서’로 날름 해석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다. 철면피를 쓰고, 나와 사람들 속에 힘겹게 회복했다. 도벽중독을 통과하며 만들어진 원칙은, 돈에 관해 어떤 골칫거리도 만들지 않는 거다. 돈을 향한 욕망을 거세하고 가난을 수긍하기. 자유고 지랄이고 전에, 일단 내 속은 편하고 보자는 관리이자 타협이다. 그래서 회피다. 도둑질을 둘러싼 자괴와 낙인은 물론 미안과 양심조차도 노예제를 위한 낱말이다. 불공정과 불평등을 덮어 기득한 자들의 질서와 안녕을 고수하고 대물림하기 위해 없는 자들을 옭아매는 덫의 학습이다. 게다가 교양과 친절과 고상과 사회공헌까지 다 그들이 차지한 세상에서 이제 내가 궁금한 건, 없이 사느라 거칠고 쌍스러워진 사람들의 처지와, 버텨가는 사연과, 그들을 옭아매는 낙인이다. 거기서 길 하나가 시작되더라. 두 아이 다 깊게 안아주라는 꿈이구나. 아이야, 세상과 너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너를 믿고, 너를 위해 울며, 네 길을 만들어라. 너무 힘들지 않게, 좋은 친구 하나는 늦지 않게 만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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