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께 백해와 발트해를 잇는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인 ‘백해 운하’ 공사 현장에 강제동원된 인부들의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표트르 팔친스키(1875~1929)는 러시아의 광산학자로, 소비에트연방 초창기 기술·산업 정책을 이끌었던 엔지니어로 꼽힌다. 애초 사회주의자-혁명가당(SR) 중도파와 가까웠으며 임시정부에서 무역산업부 차관 등 여러 공직을 맡기도 했던 그는,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혁명 때 반혁명 인사로 체포됐다. 그러나 새 국가 건설을 위해 경험 많은 엔지니어들을 필요로 했던 소련 정부는 그에게 일을 제안했고, 볼셰비키 혁명에는 동조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자로서 계획경제의 이상을 가지고 있던 팔친스키 역시 “소비에트 체제가 재건 과정으로 돌입한 이상, 모든 러시아 지식인들은 조국을 위해 헌신할 의무와 필요성이 있다”며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팔친스키의 철학과 소련 정부의 정책 기조 사이에는 너무 큰 괴리가 있었다. 산업화에서 ‘인간’이 중요하다고 봤던 팔친스키는 노동 조건이나 지역 조건을 중시하는 정책을 주창했다. 반면 소련 정부는 ‘포드주의’나 ‘테일러주의’ 같은 미국식 경영기법을 받아들여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거대 규모의 산업시설을 짓는 데만 매달렸다.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백해 운하,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거대 철강단지 등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결국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뒤인 1929년 팔친스키는 쿠데타를 꾀했다는 혐의로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미국 과학사학자 로렌 그레이엄의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역사인)은 팔친스키의 생애를 통해 ‘기술제국’ 소련이 왜 그렇게 붕괴할 수밖에 없었는지 짚은 책이다. 지은이는 소련은 인민의 힘으로 혁명을 이뤄냈지만,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일궈내는 과정에서 “인간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지적한다. 비록 스탈린에 의해 제거되어 버렸지만, 인간을 산업의 중심에 두려 했던 팔친스키의 비전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최원형 책지성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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