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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판문점, 널문리 / 김이택

등록 2018-05-07 17:12수정 2018-05-07 19:16

1592년 4월30일 새벽 경복궁을 나선 선조 일행이 임진강가에 닿은 게 이경(밤 9시~11시)쯤. 근처 정자(석화정)에 불을 질러 겨우 나룻배가 강 건너는 길을 밝혔다. 동파리에서 한숨 돌리고 나서니 이번엔 사천강이 막아섰다. 나룻배도 없는 곳이라 인근 마을 백성들이 대문을 뜯어 임시로 다리를 만들고서야 건널 수 있었다. ‘널빤지로 만든 문’에서 따온 ‘널문리’ 지명의 유래다. 그날 저녁 개성에 도착한 일행은 평양, 영변, 정주를 거쳐 6월23일 압록강변 의주까지 달아났다.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고 1년 반 만인 이듬해 10월에야 천신만고 끝에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60년쯤 뒤 6·25 전쟁 첫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유엔군은 평양, 정주를 거쳐 압록강변 초산까지 북진했다. 중공군 개입 뒤 38선 부근에서 공방을 거듭하던 양쪽은 개성 북쪽 고려동 99칸 요릿집 내봉장에서 정전 협상을 시작했다. 회담장 주변에서 북한군이 시위하는 등 중립성 논란이 제기되자 전선 중간지대인 연백평야 귀퉁이 마을 널문리로 옮겼다. 가게(주막) 앞 콩밭에 회담장이 새로 지어졌다. 중국어로 옮기면서 ‘널문’의 중국식 표기 ‘판문’에 가게를 뜻하는 ‘점’을 붙여 판문점이 됐다.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유에스비에 담아 전달했다는 한반도 신경제지도에는 서울~평양~신의주까지 서해안에 산업·물류·교통 벨트를 구축하고 이어 베이징까지 고속철도를 건설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선조가 피난 가던 길이자 명나라군·왜군과 중공군·미군이 총칼 들고 오가던 길이다. 임란 이후 두차례 호란과 일제 치하, 6·25와 분단까지 외세에 휘둘려온 치욕의 민족사가 그 길과 판문점에 담겨 있다.

북-미 정상회담이 여기서 열릴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엔 남북이 평화·번영으로 가는 길을 주도적으로 뚫었으면 한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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