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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광장’ 그리고 2018년의 이명준들 / 김은형

등록 2018-07-25 18:28수정 2018-07-26 10:08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 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스물여섯에 써내려간 작품으로 한국 현대문학사를 뒤흔든 <광장>의 최인훈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현직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이 광장에 모이기 전만 해도 이 작품이 고발하는 남한의 텅 비고 오염된 광장은 여전히 현재형의 해석이었을 것이다. 불과 2년 사이 광장은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는” 이들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많이 회복했다. 또한 <광장> 이후 60년 가까이 달라지는 것 없던 두 체제의 완강한 빗장이 열리기 시작하는 현장을 병석에서 지켜봤을 작가의 심정이 어땠을까 가늠해보며, 그 마무리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떠난 그의 별세 소식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십여년 전 읽고 책장에 꽂아뒀던 <광장>을 다시 꺼내 보다가 올해 초 나온 책 한권이 떠올랐다.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라는,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을 떠올리게 하는 부제를 단 <조난자들>이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노회찬 의원이 생전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했던 책이기도 하다. 탈북민 출신의 주승현 박사가 탈북민이 남한 사회에서 처한 현실을 가감없이 쓴 이 책에는 저자가 쓴 <광장>의 독후감이 들어 있다. 저자가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남한에 온 지 채 2년이 안 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비록 적응하는 데 혹독한 고생을 했지만 그는 아직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었기에 이 소설이 고발하는 남한 사회는 1950~60년대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이고, 오히려 북한이라면 나올 수 없는 체제비판 문학작품이 출간되는 남한은 얼마나 진일보한 사회인가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십년이 지나 다시 읽은 <광장>은 도리어 고통스러웠다. 남북한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는 낯선 이방인들, 탈북민들이 아직도 ‘이명준’으로 살고 있는 탓이다.

그는 알고 지내던 탈북민 의사 두 명의 이야기를 책에서 소개한다. 의사 ㄱ은 남한에 와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적응을 했고 언론에도 성공한 탈북민으로 여러번 보도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북한에 대한 부정과 남한 찬양만이 탈북민의 유일한 살길이라는 막다른 결론에 절망하다가 결국 제3국행을 선택해 영국으로 떠났다. 다른 의사 ㄴ은 아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남한으로 왔다. 포클레인·지게차 운전면허 등 각종 자격증을 땄지만 취업이 안 돼 공사판에서 막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2016년 여름 안전모도 쓰지 않은 채 빌딩 유리를 닦다가 추락해 숨졌다. 죽은 이는 험한 일보다 동료들에게 받는 차별을 더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ㄱ처럼 제3국으로 가서 정착했으면 어땠을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어렵다지만 그래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북한에 이어 남한을 용케 ‘탈출’한 ㄱ과 결국 남한에서 참혹하게 생을 마무리한 ㄴ 둘 다, 전쟁 포로였던 이명준의 신분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었을까.

주승현 박사는 소련 해체를 예언했던 노르웨이 평화학자 요한 갈퉁을 인용한다. “전쟁이 끝난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며 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전쟁보다 더 잔인한 것일 수도 있다.” 백만 촛불이 광장에 모였을 때 많은 이들이 빼앗겼던 광장을 다시 찾았다고 기뻐했다. 이 광장은 정말 모든 이들이 우람한 합창의 대열로 초대받을 수 있는 열린 광장일까. 들뜬 마음으로 종전선언을 기다리는 요즘, <광장>을 다시 읽어야 할 때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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