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리라화 폭락의 배경에는 미국과 터키 간 복잡한 갈등이 깔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1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쳐다보고 있다. 브뤼셀/AFP 연합뉴스
유럽 나라들의 화폐 이름 중엔 무게 단위에서 비롯된 게 많다. 영국의 ‘파운드’화가 좋은 예다. 파운드는 중량 척도이기도 하다. ‘유로’화 도입 이전 독일 화폐 ‘마르크’도 금과 은의 무게를 잴 때 2분의 1파운드의 뜻으로 쓰던 ‘마르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의 옛 화폐 ‘리브르’와 이탈리아의 ‘리라’ 역시 1파운드의 무게를 뜻하는 말이었다. 한국의 원화, 중국의 위안화, 일본의 엔화가 둥글다(圓)는 ‘모양’에서 비롯됐다는 것과 달라 흥미롭다.
리라는 유로화 등장 이전 이탈리아 밖에서도 쓰던 화폐 단위였다. 지금은 유로화로 바뀐 산마리노, 바티칸, 몰타의 화폐가 리라였다. 리라(Lira)가 지금은 터키의 화폐 단위로 쓰이고 있다. 고대 로마의 중량 단위인 ‘리브라’(libra)가 리라의 뿌리라고 하니 종주국은 이탈리아인 셈이다.
미국 달러화에 견준 리라화의 가치가 폭락하자 남아공, 인도, 러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같은 신흥국의 금융시장도 흔들리고 있다. 미국이 지난 10일 터키산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2배 올린 데서 촉발된 사태다.
리라화 폭락을 불러온 미국의 관세보복에 붙은 이유가 겉으로는 터키 당국의 미국인 목사 억류였다. 근본적으로는 미국과 터키의 관계가 나빠진 탓이라고 풀이하는 전문가가 많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터키 정권과 트럼프 대통령의 미 행정부는 복잡다단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 터키가 시리아 내전에서 미국의 적국인 이란·러시아와 안보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신경을 건드린 게 한 예다. 1990년대 멕시코,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 때와 달리 미국이 해결사로 나서기는커녕 되레 즐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국내 금융시장에 끼치는 영향은 작다고 하지만, 우리 처지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곱씹어볼 대목이 많은 사태인 듯하다.
김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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