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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추상미가 폴란드로 간 까닭은 / 김은형

등록 2018-10-17 18:04수정 2018-10-18 09:27

김은형
문화에디터

10월 초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의 수많은 화제작 가운데 눈에 띈 작품 하나는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었다. 우선 배우 추상미의 이름이 감독 자리에 들어간 게 눈에 띄었다. 지난해 같은 위치에서 배우 문소리의 이름을 발견해 반가웠는데 이번에는 한동안 스크린에서 안 보여 궁금하던 배우 추상미라니 기대가 됐다.

추상미의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여배우의 현실을 위트 있게 담아낸 문소리의 자기반영적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와 달리 꽤 묵직한 영화였다. 처음 공개된 건 아니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이가 잘 알지 못했던 북한 전쟁고아들을 다룬 이야기였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아이들 수천명을 돌볼 수 없어 러시아와 체코, 동독 등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에 보냈다고 한다. 남한처럼 입양을 보낸 게 아니고 돌봄을 요청해 보낸 거였다. 그중에 아이들 1천여명이 폴란드의 작은 시골 양육기관으로 보내져 짧게는 2년 길게는 8년 가까이 함께 자랐다. 추 감독은 폴란드의 그 지역으로 가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80~90대가 된 당시 교사들을 인터뷰하며 전쟁고아들의 삶을 더듬어간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을 회고하며 눈시울이 붉어지다가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처음엔 의아했다. 북한의 전후 재건사업으로 총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아이들을 모두 보내야 했던 심정이 안타까웠겠지만 그래도 60년이나 지난 과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이토록 생생하게 아파할 수 있을까.

그 답이 뒤에 나온다. 알다시피 폴란드는 2차대전을 가장 혹독하게 겪은 나라였고 인종말살의 상징인 아우슈비츠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자란 교사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겪었고 누군가는 실제로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하기도 했다. 상처 입은 이들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이 같은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랬다. 머리에는 온통 이가 득실하고 텅 빈 배는 기생충으로 채워졌으며 경계심 가득한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끌어안았다. 아픈 아이들을 밤새워 돌보고 기꺼이 자신의 아이들을 데려와 북한 아이들과 함께 키웠다. 북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다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쓴 편지를 받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자책하고 여전히 아이들의 한참 지난 미래를 근심하고 있었다.

영화는 전쟁고아들이 보낸 폴란드의 시간과 교사들의 감동적 헌신을 담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묵직한 화두를 연결한다. 그가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탈북민 아이들이다. 이른바 ‘꽃제비’를 화면에서 본 충격과 고민을 영화로 확장한 그는 본래 극영화를 찍으려 탈북민 아이들의 오디션을 봤다. 인터뷰를 통해 듣는 아이들의 탈북 이야기는 많은 것이 생략되었는데도 고통스럽다. 그 과정에서 받은 트라우마로 양손을 떨게 된 청년,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줄 알고 버려진 경험이 있는 소녀, 그리고 아픈 과거를 좀처럼 꺼내려 하지 않는 폴란드행 동반자 송이.

전쟁으로 인해 처한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또 하나의 악몽 같은 전쟁을 치러야 했던 아이들이다. 폴란드 선생님들처럼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사람을 탈북민 아이들은 남한에서 만났을까. 21세기를 사는 아이들이 반세기 넘게 지난 시절의 아이들과 같은 상처를 받는다는 게 끝나지 않은 전쟁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다.

추상미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친구들(탈북 청소년)을 통해 우린 지금 통일을 연습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사실상의 종전이 진짜 종전이 되려면 선언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이러한 통일 연습 아닐까.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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