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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법’이 가로막고 있는 것들 / 석진환

등록 2018-12-02 18:17수정 2018-12-03 15:17

석진환
정치사회 부에디터

요즘 내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건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아들에게 아직(!)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중2병이 온 것 같지 않은데도 그렇다. 아들과 관계를 잘 풀지 못한 채 매번 내 ‘바닥’만 드러냈다는 낭패감이 들어 그런 듯하다.

주로 이런 식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평소 아들과 조곤조곤 사소한 대화를 못 한다. 어쩌다 아들에게 한다는 말은 대부분 ‘하지 말라’는 잔소리다. 가끔 심하게 눈에 거슬리는 행동이나 잘못을 ‘적발’하면, 톤을 높여 또 야단을 친다. 그때마다 아들은 대꾸가 없다. 표정엔 ‘승복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적혀 있다. 서로 감정만 상했을 뿐 둘 사이에 어떤 소통이 됐을 리 없다. 건넬 말을 준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텐데, 그걸 매번 미루다 다시 손쉬운 훈계를 택하는 악순환이다.

나 말고도 주변에 이런 악순환을 겪는 이들이 꽤 있다.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면, 숨 쉴 틈 없이 바쁜 ‘다이내믹 코리아’도 내 처지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신문사 정치·사회부 언저리를 오간 탓인지, 강력범죄 등 이슈가 된 사건이 터지면 순식간에 가해자나 피해자 이름을 딴 ‘○○○법’ 같은 게 논의되는 걸 자주 본다. 대체로 그런 법안은 차분하게 원인을 진단하고 예방책을 고민하지 않는다. 더 강력한 처벌이 목표다. 법안은 들끓는 여론이나 불같이 화를 내는 부모를 닮았다. 이런 법안을 내놓은 입법자는 ‘민심을 떠받드는’ 생색도 내고, 사람들의 분노를 가장 돈 안 드는 방식으로 달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린다. 취약계층 보호, 재범 방지를 위한 교화, 범죄 피해자 사후 보살핌 등에는 세금이 많이 든다. 범죄자를 오래 교도소에 가두는 게 돈이 덜 든다. 모두 그렇게 잠시 발끈해 ‘엄한 처벌’을 다짐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지난 10여년간 ‘○○○법’은 너무 쉽게 만들어졌다. 반면 화이트칼라 범죄를 처벌하는 법안이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법안 등은 매번 원점을 맴돈다. 이상하지 않은가. 처벌 수위가 끊임없이 높아진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기득권에서 비켜난 약자들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회가 공모해 가상의 범죄자에게 엄포를 놓는 사안 중에는 꽤나 민망한 것들도 있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소년법’ 개정안이 그런 경우다. 이 역시 잊을 만하면 터지는 청소년 강력범죄가 발단이 됐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소년법 개정안만 30건에 가깝고 절반 이상이 ‘형사미성년자 기준 하향’이나 ‘수월한 신병확보’ ‘강력범죄 처벌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며 투표권도 주지 않으면서, 범죄는 성인과 같은 수준으로 처벌하자는 법안도 있다.

국회는 2007년에도 촉법소년 기준을 ‘하향 강화’하는 법 개정을 한 적이 있다. “국제인권기준 위반”이라는 국가인권위의 반대도 무시했다. 그랬던 국회가 이번에도 손쉽고 값싼 방법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예산 심사 때 소년보호시설 지원이나 교화 프로그램 예산 등은 누구도 나서서 챙기는 이가 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투표권도 없는 소년 범죄자 예산은 국회에서 가장 후순위”(전직 법무부 간부)라는 한탄이 나왔을까.

소년법 개정안을 포함해 이런저런 강력범죄로 불거진 ‘○○○법’류가 미덥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처벌 만능주의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 없다. 나아가 좀 힘겹더라도 올바른 해법으로 향하는 길을 틀어막는다. 아이를 야단치는 것만으로 부모 자식 간에 공감이나 소통을 기대할 수 없듯이, 우리 사회도 처벌에만 기댄다면 갈등이 더 격해질지 모른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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