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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쌍피’와 ‘독박’ / 안영춘

등록 2018-12-04 16:45수정 2018-12-04 19:14

그래픽 장은영
그래픽 장은영
‘쌍피’는 <이웃집 찰스> 같은 외국인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들도 알 만큼 널리 쓰이는 화투 용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엔 등재돼 있지 않지만, ‘일타쌍피’는 ‘일석이조’를 누르고 언어 생태계의 우점종이 됐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는 ‘쌍피’도 있다. 폭행 사건의 양쪽 당사자를 동시에 입건할 때 ‘쌍피 사건’이라고 한다. 이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은 물론, 형법이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도 나오지 않는다. 본딧말의 용례를 살펴보면 ‘쌍방 피해’와 ‘쌍방 피의’가 혼재돼 있다. 준말의 형태소를 아예 벗어나 ‘쌍방 폭행’으로도 쓰인다.

법률 용어도 아니고 정확한 어원조차 알 수 없지만, 검경은 ‘쌍피’를 선호한다. 애써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양쪽을 함께 입건한 뒤 합의를 유도해 불기소하거나 벌금형으로 약식기소하는 경로가 관행화돼 있다. 수사도 쉽고 사건 처리도 간단하니 그야말로 일타쌍피다. 수사당국도 폐해를 모르진 않는다. 경찰은 2011년 ‘쌍방폭력 정당방위 처리 지침’을 마련해 ‘쌍피’를 엄격히 적용하도록 했다. 그러자 한쪽의 행동이 정당방위(형법 제21조)로 인정되는 경우가 5배 남짓 늘었다.

그러나 한때뿐이었다. “멱살을 뿌리쳤더니 쌍피가 되더라”라는 하소연은 여전히 인터넷 여기저기서 쉽게 발견된다. 올해 광주에서 벌어진 길거리 무차별 집단폭행 사건이나 가수 구하라씨가 당한 리벤지 포르노 협박 사건도 여론이 들끓지 않았다면 자칫 ‘쌍피 사건’이 될 뻔했다. 쌍피가 진실에 더 부합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대구에서 일어난 50대 부부와 청년들 사이의 폭행 사건과 얼마 전의 이수역 폭행 사건은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한쪽 당사자의 주장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쌍피 남용이 진실 추구의 과정을 허술하게 만드는 건 틀림없다. 진실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계적인 쌍피 적용을 넘어 한쪽에 ‘독박’을 씌우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정도의 비폭력주의를 약자에게만 과잉 적용하는 현실은 ‘쌍피 남용’의 이면이다. 그 효과는 언론이 주도하는 담론 영역에서 훨씬 강력하게 나타난다. 세월호 가족이 폭행사건 가해자가 되자 “유족이 벼슬이냐”는 비난이 가해졌다. 8년 동안 회사 쪽의 갖은 폭행을 당해온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임원을 폭행했다가 맞닥뜨린 지금 상황은 또 어떤가.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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